"민머리 가발없어 삭발시키던 시절...이젠 압도적 경쟁력 갖췄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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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허세민의 인터미션최근 '뮤지컬 덕후'(뮤덕)들 사이에선 오는 5월 말 개막하는 뮤지컬 '팬텀'의 캐스팅 명단이 화제를 모았다. 10주년을 맞아 가수 박효신을 비롯해 카이, 전동석 등 화려한 출연진이 참여한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다.
35년 경력 김유선 분장디자이너 인터뷰
뮤지컬 '명성황후'부터 '오페라의 유령'까지
한 사람의 손끝에서 탄생하는 가발의 세계
이번 캐스팅은 '깜짝 발표'였지만, 뮤지컬 업계는 일찌감치 출연 예정 배우들을 만나 비밀을 유지한 채 작품 준비에 돌입한 상태였다. 팬텀에 사용되는 가면과 가발을 만든 분장 디자이너 김유선(59) 킴스프로덕션 대표도 그 중 한명이다. 지난달 방문한 그의 서초동 사무실에는 팬텀 출연 배우들의 이름과 얼굴이 나온 종이가 벽면에 붙어 있었다.

▷뮤지컬 분장팀은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나요?
"우리나라 분장팀이라면 전부 가발을 만들어야 해요. 화장도 맡고 있죠. 공연 시작 1~2시간 전에 가발을 세팅해 놓고, 공연 중간중간에 가발을 만져주는 역할을 해요. 뮤지컬 '아이다'의 경우 영국 웨스트엔드에선 메이크업팀이 2명, 가발팀이 10명이에요. 우리는 그 일을 단 4명이 하고 있어요. 가발 수는 작품마다 다른데, 뮤지컬 '모차르트'나 '마리 앙투아네트'는 100개가 훌쩍 넘습니다."

"팬텀은 가발보다 가면이 중요한 작품이에요. 팬텀 배역이 쓰는 기본 가면이 있는데 감정에 따라 분노 가면, 눈물 가면 등 6개 가면이 있어요. 착용 중 문제가 생길 수 있어서 한 가면당 5~6개 정도 예비로 준비하고요. 배우에 따라 요구하는 게 달라 디자인도 조금씩 변화를 줬어요. 가발은 보통 한 번 만들면 세 시즌을 이어 쓰는데, 팬텀은 7번째 시즌으로 돌아오는 만큼 이번엔 가발 디자인을 싹 바꿨습니다."
▷분장에서 화장보다 가발 제작 비중이 크다고 들었습니다. 가발은 어떤 과정을 거쳐 만들어지나요?
"먼저 두상 크기를 재려면 배우들 머리 위에 랩을 씌워야 해요. 랩을 단단하게 고정하기 위해 그 위에 투명 테이프를 붙이고, 머리카락이 나는 헤어라인 방향대로 테이프에 표시하죠. 구레나룻까지 다 그립니다. 두상의 전체 크기, 뒷목 둘레 등을 잰 뒤엔 랩을 벗겨서 두상을 형상화한 블록에 얹어요. 그 위에 망을 얹고 한 올 한 올 머리카락 방향대로 인모(人毛)를 심은 뒤 스타일링을 합니다. 배우가 불편하지 않게, 가볍게 만드는 게 가장 중요해요."
"제 인생 뮤지컬 명성황후에선 일본 사람이 민머리 가발을 써야 해요. 이 일을 처음 시작한 1990년대 초에는 가발 제작 실력이 부족해 가발로는 검은 머리카락을 완벽히 가릴 수 없었어요. 그래서 배우들을 꾀었죠. '머리를 밀어달라. 그럼 분명 관련 광고도 찍을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직접 연결해주겠다.'고요.(웃음) 뮤지컬 '페임' 때는 한 배우가 가발을 안 쓰고 파마만 8번을 했는데, 공연이 끝나니 탈모가 왔어요. 지금 그렇게 하면 고소당하죠.(웃음)"
▷일반 관객들은 잘 모르는 가발 제작 비하인드가 있으신가요?
"가발 자체는 무겁지 않아요. 특히 머리를 위로 높이 올린 화려한 로코코 양식의 '프레임 가발'이 있는데, 이건 보기와 다르게 일반 가발보다도 가벼워요. 가발 안이 텅텅 비었거든요. 얇은 철사로 틀을 만들어 가발을 씌우는 게 기술이죠."
▷가발 제조 기술이 어떻게 발전했는지 궁금합니다.
"1996년, 라이선스 뮤지컬 '브로드웨이 42번가'가 국내에서 초연할 때였어요. 당시 해외 디자이너팀이 강력한 헤어 드라이어인 '가발 오븐기'를 가져온 걸 보고 놀랐어요. 그러다 2001년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 초연 때, 직접 오븐기를 만들기 위해 청계천으로 갔죠. 거기서 일주일을 돌아다니며 부품을 구해 가발 15개가 들어가는 오븐기를 만들었어요. 헤어롤로 스타일링을 한 뒤 오븐기에 넣으면 가발이 굳어요. 스프레이를 안 뿌려도 가발이 굳으니까 오래 가는 장점이 있습니다. 지금은 소형 오븐기를 공연장에 가지고 다니며 사용하고 있어요."
"똑같은 가발이어도 해외에선 500만원 하는 것을 우리는 100만원에 팔아요. 이익을 내기 위해서라기보다 뮤지컬을 위해, '사명감'을 가지고 일하기 때문이죠. 가격 경쟁력이 있다 보니 해외에서 수출 문의가 들어오기도 했어요. 아쉽게 코로나19 당시 공연이 멈추면서 없던 일이 됐지만요."
▷뮤지컬 분장 업계엔 어떻게 발을 디디게 되셨나요?
"진로를 고민하던 20대 초에 친구 소개로 한 방송국 무대의 분장팀으로 참여했어요. 해보니까 재밌더라고요. 영화와 드라마도 해봤는데 뮤지컬이 적성에 맞았어요. 초등학생 때부터 모은 LP판이 3000장에 달할 정도로 음악을 굉장히 좋아하는데, 뮤지컬에 음악이 큰 요소라는 점도 영향을 준 것 같아요."
"초연부터 함께 한 명성황후가 인생 뮤지컬이고, 더 넓은 세상을 보게 한 작품은 오페라의 유령이고요. 발전된 가발 제조 기술을 집약시킨 건 모차르트예요. 그런 면에서 가장 많은 심혈을 기울인 모차르트 배역의 가발이 제 역작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어떤 목표를 가지고 계신가요?
"'예전 같지 않다', '한물갔다'는 평가를 듣는 순간, 저는 이 일을 접을 거예요. 오랜 시간 정상의 자리를 유지해온 만큼 조금의 흠결도 나고 싶지 않거든요. 지금도 하나라도 더 배우며 계속 발전하고 있습니다. 제 목표는 70살까지 일하고, 이후에는 능력 있는 후배에게 회사를 물려주는 거예요."
글=허세민/사진=이솔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