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종이라고요?” 가벼운 재료로 만든 깊은 이야기

[arte]정연진의 오늘의 미술

신상욱 작가

조각 작품 재료로는 낯선 하드보드지로 작업
종이라는 일상적 재료를 예술 영역으로 승화
소위 화이트 큐브(White Cube)라고 이야기하는 새하얀 전시장은 벽, 바닥, 천장이 모두 깨끗한 흰색으로 칠해져 있어, 관람객이 작품에 집중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이 무색의 공간은 작품의 색상이나 형상에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설계되었으며, 주변 환경의 영향을 최소화한다. 또한 이는 마치 연극 무대와도 같아서 관람객이 그 안에 들어서는 순간 벽과 공간의 요소가 미술 작품을 돋보이게 하며, 관람객이 작품에 몰입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한다. 잔뜩 몰입할 기대를 안고 들어섰지만, 어라? 작품이 보이지 않는다.
신상욱 개인전 《SPACE – Pillar》(2025.3.11 – 4.11), Goodspace, 대구 전시 전경 / 사진. © 정연진
신상욱은 조각가다. 하지만 그의 조각은 조금 다르다. 일반적으로 조각 작품은 좌대에 놓여 있어, 그 무게감과 위압감이 관람자에게 조심해야 한다는 무언의 압박을 전달한다. 그렇기 때문에 관람객은 작품 주변을 조심스럽게 걸으며 일정 거리를 유지하게 된다. 그러나 신상욱은 이러한 전통적 조각의 관습에서 벗어나 전혀 다른 방식을 택했다. 그는 작품을 공간과 하나가 되도록 만들어, 관람객이 작품과 더 자유롭게 교감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한다.

그의 작품은 벽면에 붙어 있거나, 천장에서 매달려 공간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진다. 때로는 모서리에 위치하거나 바닥에서 천장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이는 단순히 공간에 '배치'되는 것이 아니라, 공간에 '어우러진다'는 느낌을 강하게 전달한다. 전시 공간 속에서 그의 작품은 기존의 고정된 조각을 넘어서 공간과 상호작용하며, 기둥이나 벽면과 같은 건축적 요소가 작품 속에서 조각적 역할을 한다.

그렇기에 작가는 전시 공간을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작품의 일부로 보고, 이를 캔버스처럼 활용한다. 그에게 공간은 단지 작품을 놓는 장소가 아니라, 작품과 상호작용하는 살아있는 요소이다. 전시 공간이 정해지면 도면을 받아 작품을 그 공간 안에 어떻게 배치할지 고민의 고민을 거듭하여 구상한다. 그저 기능적으로만 존재하던 공간 요소인 벽면, 기둥, 천장, 모서리 등에 작품을 놓음으로써 이들을 미적 공간으로 탈바꿈시킨다. 그의 손길이 닿은 평범한 공간 요소들이 예술 작품으로 변모하는 것이다.
신상욱 <25space 3>(2025), Paper(board), 10 x 10 x 100(h)cm / 제공. 신상욱
신상욱 <25space 1>(2025), Paper(board), 9 x 9 x 100(h)cm / 사진. © 정연진
신상욱의 작업에서 특히 눈에 띄는 점은 재료에 있다. 멀리서 보면 차가운 금속이나 묵직한 스테인리스처럼 보이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놀라운 사실이 드러난다. 그의 작품은 모두 종이, 그것도 흔히 모형 제작에 쓰이는 하드보드지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전통적인 조각은 돌, 브론즈, 금속처럼 무겁고 단단한 재료를 떠올리게 마련이다. 그런 점에서 종이는 조각의 재료로는 다소 낯설게 느껴진다.

하지만 신상욱은 이 익숙하지 않은 재료를 과감하게 예술의 무대 위로 끌어올렸다. 관람객 대부분은 그의 작품이 종이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다. "진짜 종이라고요?"라는 반응은 전시장에서 자주 들리는 말 중 하나다. 이 놀라움은 단순한 반전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작가가 의도한 감각적 착시, 그리고 그 안에 담긴 실험 정신이 제대로 전달되었다는 방증이기 때문이다. 신상욱은 전통적인 방식에 대한 존중을 바탕에 두되, 늘 새로운 재료와 표현 방식을 탐구해 왔다. 종이라는 매체는 가볍지만, 그 안에 담긴 조형적 가능성은 결코 가볍지 않다. 그리고 그는 그 가능성을 누구보다 정교하게 펼쳐내고 있다.

신상욱이 종이에 눈길을 돌리게 된 건 꽤 우연한 계기였다. 전시를 준비하던 중, 모형을 만들기 위해 쓰던 하드보드지가 그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이다. 평소엔 평면적인 재료로만 여겨지던 종이에 입체감을 더해보겠다는 발상이 시작이었고, 이 만남은 그의 작업 방향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그는 다양한 색상의 하드보드지를 정교하게 자르고, 이를 공간 안에 새롭게 배치하면서 전에 없던 입체 조형을 만들어낸다. 종이는 보기엔 약해 보이지만, 여러 면이 맞물려 생기는 구조적 긴장감 덕분에 생각보다 꽤 단단하다. 신상욱은 이처럼 종이의 물성과 가능성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며, 가볍지만 힘 있는 조각 세계를 만들어가고 있다.
《예술의 맛: Enjoy Your Art》(2023.11.26 – 2024.3.24), 시안미술관, 영천 전시 전경 / 제공. 시안미술관
신상욱 <23space 9>(2022), Paper(board), 46 x 108 x 12(h)cm / 제공. 시안미술관
이러한 혁신적 시도는 결코 쉬운 여정이 아니었다. 기존의 조각 기법과는 완전히 다른 접근 방식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조각에서 사용하는 새기기, 깎기, 살붙이기 등의 기술은 종이 작업에서는 적용할 수 없었다. 그는 완전히 새로운 출발점에서 자신만의 기법을 개발해야 했다. 처음에는 단순한 평면 작업으로 시작했으나, 이것을 진정한 입체 조각으로 발전시키기까지는 수많은 시간과 끊임없는 실험이 필요했다. 이러한 도전과 인내를 통해 신상욱은 종이라는 일상적 재료를 예술의 영역으로 승화시켰다.

신상욱의 작업은 우리에게 새로운 시선을 건넨다. 그의 작품을 보고 나면, 그동안 무심히 지나쳤던 공간들이 조금 다르게 보이기 시작한다. 사무실의 기둥, 카페의 벽, 집 안의 모서리까지, 이 평범한 구조물들이 어느새 잠재적인 예술 작품처럼 다가온다. 그의 작업은 예술이 특별한 장소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 속에 이미 스며들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니 다음번에 건물의 벽을 스치듯 지나칠 때, 잠시 멈춰 그 공간의 구조나 빛의 흐름을 바라보자. 어쩌면 그 안에도, 조용히 예술이 숨 쉬고 있을지 모른다. 우리가 필요한 건 거창한 안목이 아니라, 단지 조금 열린 시선이다.

정연진 독립 큐레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