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루지 않으면 미완성? 브라질리언 '리지아 클라크'의 금속과 동물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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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서정의 어쩌면 나만 아는 명작들
'예술의 민주화'를 바랐던 예술가
리지아 클라크(Lygia Clark) (1920-1988)
“누군가가 자신을 표현할 수 있도록 내 예술의 무언가를 제공하는 것이 멋지다고 생각합니다”
- 리지아 클라크(1920-1988)


리지아 클라크는 브라질 현대 화가이자 설치미술가로 자신을 비(非)예술가로 선언했던 예술가다. 초기에는 기하학적 추상에 몰두하였으나, 후에는 신체 지각체험의 다양한 변형을 통한 나와 타인, 예술과 삶의 통합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리지아 클라크의 작품 <(기계) 동물>은 금속을 경첩으로 연결하여 부피감을 생성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경첩은 마치 동물의 관절처럼 기능하면서 구조화된 다양한 형태의 움직임을 만든다. 즉 여러 개의 경첩을 접고 펼 때마다 움직임이 생기면서 행위자에게 ‘반응’하는 생명체가 되는 것이다.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동물>은 단순히 관조하거나 만져볼 수 있는 존재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관계를 요구한다. 그것은 각 자극에 대응하는 자체의 반응을 지닌다.” 경첩이 만들어낸 다중 축은 단단하고 차가운 물체인 금속에 유연성을 제공하는데, 관찰자이자 상호작용하는 ‘나’와 관계를 맺게 되는 몇몇 금속 기계에 리지아 클라크는 다소 장난스럽게 <편집증>이라든가 <우주의 새>라든가 하는 별명을 붙이기도 했다.
1920년 브라질 벨루오리존치에서 태어난 리지아 클라크는 결혼과 함께 리우데자네이루로 이주했고 조경예술가 부를리 마르크스에게 그림을 배웠다. 이후 파리로 가 페르낭 레제를 사사했는데(1950-52), 1950년대의 작업을 살펴보면 입체주의 세례를 나름의 방식으로 소화하기까지 단기간에 그 변화의 폭이 무척 커서 이후 도래할 급진적 ‘참여’ 예술의 전조가 일찍이 보인다고도 말할 수 있겠다.
클라크가 활동한 당시 리우데자네이루에서는 보사노바의 리듬을 타고 모더니즘 건축가들과 시각 예술가들이 대담한 실험을 수행했으며, 구성주의를 적용하여 완전히 브라질적인 것, 즉 콘크리트와 네오콘크리트 운동을 벌였다. 특히 네오콘크리트 운동은 철학적으로 ‘몸 자체’를 강조한 프랑스 사상가 메를로 퐁티의 현상학에서 영향을 받았다. 리지아 클라크는 2차원 추상화에서 신체적, 감각적 접근 방식을 채택한 3차원 구조로 작품 제작 방식을 발전해 나갔다.
<동물>(1960-64) 이후에도 클라크는 고무 같은 더욱 유연한 재료를 사용해 <유충>(1964) 시리즈를 만들어 관람자의 자극 반응 연구를 계속했다. 리지아는 예술가로 보다는 제안자라고 불리기를 원했다. 그렇게 스스로 예술가라는 명칭을 버렸다.
비예술의 예술: 예술과 예술가의 개념을 변화시킴
예술이 무엇일 수 있고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은 전통적 미술 형식의 한계를 다루게 했고, 리지아 클라크는 관객에 대한 적극적 관심으로 신체를 유토피아적이고 정치적으로 다뤘다.
1964년부터 클라크는 감각에 뿌리를 둔 예술을 창조하기 위해 역설적으로 예술 작품 생산을 포기하려는 의도로 <몸의 노스텔지어> 시리즈를 시작했다.
이는 참가자들의 신체 인식을 활성화하는 일련의 부드러운 조각품이자 감각적인 오브제였다. 물론 참여자의 신체에서 발생하는 개별 경험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기획이었다. 1966년 작품 <손의 대화>는 두 참여자의 손을 늘어나는 뫼비우스의 띠로 묶었고, 1966년 <돌과 공기>는 공기로 채워진 작은 비닐봉지 위에 조약돌을 놓아 사람의 손이 가하는 압력으로 조약돌이 춤추게 했다. 1967년에는 탯줄을 연상시키는 튜브로 연결된 고무 슈트를 입게 하는 <나와 너>를 선보였다. 메를로 퐁티식으로 ‘주체와 객체의 얽힘’과 공명했다.
신체에 대한 공간적, 심리적 이해에 도달하고 참가자들의 탐구 과정을 촉진하고자 하는 클라크의 열망을 잘 보여준다. 클라크는 관람자의 몸이 작품인 동시에 주체라는 점을 강조하며, 이러한 행위를 ‘살아있는, 생물학적 구조물’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신체 소통 공간의 재구성을 나중에는 정신 치료를 위한 다양한 방법과 실험으로 발전시켰다.
1964년 브라질에서 쿠데타가 일어나 1984년까지 지속된 억압적인 군사 정권이 수립되었다. 망명지 파리에서 클라크는 68혁명을 체감했다. 이 시기 클라크의 참여적인 작품은 브라질의 긴장된 정치 상황과 동시에 파리의 불안에 대한 반응으로 평가되었다. 이 시기 그의 작업은 브라질에서 일어나고 있던 트로피칼리아 운동과 같은 광범위한 창작 운동의 발전에 반향을 일으켰다. 클라크는 소르본에서 <이미지와 몸>(1970-75)이란 이름으로 수업을 진행했다. 현실 공간을 작업에 끌어들여 관람자가 직접 몸으로 참여하는 워크숍이었다.
1970-80년대 클라크의 연구는 일면 개인적인 심리 치료 경험에서 촉발되어 예술과 삶의 통합에 대한 시도로 전환된 면이 있다. 파리 시절 그녀는 집단행동에 참여하는 참가자 그룹을 포함하는 ‘집단 신체’라는 일련의 제안을 만들었다. 널리 알려진 대화형 예술 작품 중 하나는 <식인성 침흘리기>(1973)다. 입 안에 면 실패를 넣고 실을 천천히 끌어내면 타액과 섞인 실이 점점 타인을 감싸게 되는 것이었다.
이 작품은 입에서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어떤 물질에 대해 꾼 클라크의 꿈에서 출발했다. 그녀는 그것을 다른 사람들이 삼킨, 살아온 경험이 거꾸로 토해지는 것으로 보았다. 더욱 노골적인 제목의 <카니발리즘>(1973)은 참가자들이 눈을 가린 채 둘러앉아 가운데 누워있는 사람의 옷에 붙은 주머니 속에서 과일을 찾아 먹는 방식으로 참가자가 스스로의 정체성을 발견해 나가도록 했다.
1977년 클라크는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로 돌아갔다. 경력 후반에 클라크는 미술 치료에 더 집중했다. 자신의 치료법을 자기 구조화(Self Structuring)라고 불렀다. 특정 사물의 힘이 심리 치료 환자에게 생생한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이유를 밝혀내고 싶었다. 이 탐구는 1988년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리지아 클라크의 예술적 궤적은 현대 예술가의 창작 과정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예술의 개념이 어떻게 성숙해가는지 상세히 보여준다.
다시 <동물>로 돌아가 이야기를 마친다면, 클라크는 (사실상 ‘소장’ 가능한 마지막 작품이 <동물> 연작이었다) 자신의 연작이 박물관이나 미술관이 아니라 길모퉁이를 포함한 모든 곳에서, 노점상에서도 팔리기를 바란다고 말한 바 있다. 예술의 민주화를 원했달까. 그저 수동적으로 움직여 볼 수 있는 장난감이 아니라 관람자에게 예상치 못하거나 원치 않는 반응을 일으킬 수 있는, 때로 심술 궂은 생물로 간주했기에 클라크가 부여한 이름도 사실 ‘동물 녀석’ 정도가 정확한 번역일 것이다. 다루지 않으면 미완성으로 남는 이 녀석과 당신은 어떤 대화를 나누겠는가?
서정 에세이스트•번역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