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가 길인가”… 이자람과 떠난 러시아 설원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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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 판소리 '눈, 눈, 눈' 공연"여러분,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제가 부채를 활짝 펴서 흔들면 눈보라 소리 좀 같이 해주실 수 있나요? 한번 해볼까요?"
톨스토이의 '주인과 하인' 각색
지난 7일 소리꾼 이자람의 창작 판소리 '눈, 눈, 눈'이 첫 막을 올렸다. 검은 개량한복을 입고 무대에 나타난 이자람이 새하얀 부채를 펼쳐들자, 관객들은 입으로 '쉬~'라는 소리를 내뱉으며 힘껏 호응했다. 벚꽃이 흩날리는 4월 초임에도 관객들은 눈보라가 몰아치는 영하 28도 러시아의 드넓은 눈밭으로 빨려들어갔다.

눈, 눈, 눈은 바실리의 행동과 심리를 깊이 파고든다. 마을의 이장격인 바실리는 오직 숲을 매입하기 위해 험악한 날씨에도 발길을 재촉한다. 기력이 다한 제티가 고꾸라져도 고삐를 놓지 않는다. 그러다 완전히 길을 잃고선 얼어죽을 위기에 처한다. 그런 바실리를 보며 ‘쉬었다 갔으면 어땠을까’, ‘왔던 길을 되돌아갔으면 어땠을까’ 하는 안타까움이 이자람의 탁월한 판소리와 함께 관객들에게 전해진다.
이자람은 이번에도 '천의 목소리'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극의 내용을 설명하는 해설자에 더해 바실리, 바실리 부인 아나스타샤, 니키타, 눈밭에서 만난 농부들 등 10명 이상(말과 개 포함)을 연기하면서다. 바실리와 니키타를 태운 말 제티의 울음 소리, 개 짖는 소리, 눈보라 소리 등 의성어와 의태어도 기가 막히게 표현하며 관객들의 탄성을 자아냈다. 전작 노인과 바다에선 노인 산티아고가 청새치를 낚는 역동적인 모습을 보여줬다면, 이번에는 제티가 당근을 "꼬득꼬득" "아드득아드득" 씹어먹는 소리를 오로지 입으로만 구현하며 탁월한 능력을 입증했다.

이준형 고수와도 완벽한 호흡을 자랑했다. 그는 "그렇지", "얼씨구", "좋다" 등 추임새를 적절히 넣어주며 이자람에게 흥을 불어넣었다. 처음엔 낯설어하던 관객들도 후반부로 갈수록 추임새로 호응하며 무대에 몰입했다.
이자람은 본격적인 공연이 시작되기 전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살면 얼마나 살고, 지구가 살면 얼마나 살꼬. 세상 벗님들아, 지난 시간도 다가올 시간도 툭툭 털어버리고. 어떠냐 아~하는 마음으로 맛있는 것, 좋은 것 찾아다니며 살아보세."
'눈, 눈, 눈'은 오는 13일까지 마곡 LG아트센터에서 공연한다.
허세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