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주의 영감과 섬광] 일상의 안녕은 공짜가 아니다

장석주 시인·문학평론가
일러스트=추덕영 기자
일러스트=추덕영 기자
얼마 전 서울 시내에서 일어난 땅꺼짐 사고로 한 오토바이 운전자가 싱크홀에 매몰돼 목숨을 잃었다. 아스콘으로 포장한 도로가 갑자기 꺼지며 생긴 구멍으로 누군가가 실종됐는데, 하필 그 시각에 그 도로를 지나지 않았다면 그에게도 그날은 평범한 하루였을 테다. 그랬더라면 아무 전조 현상도 없이 일어난 땅꺼짐 사고로 생명을 잃는 일도, 단란한 가정의 일상이 단박에 산산조각 나는 일도 없었을 테다.

안락한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지

일상은 문명의 법과 질서, 상식과 규범 안에서 이뤄진다. 쓰거나 달콤하지 않은 평범한 날의 일상이 의식에 도드라진 채 떠오르는 일은 드물다. 미국 문화인류학자인 캐슬린 스튜어트는 <투명한 힘>에서 우리 자아와 의지를 품은 채 진부한 리듬으로 흘러가는 일상을 콕 집어 이렇게 말한다. “일상이란 밀려드는 감정, 부딪치거나 가까스로 모면한 충격들에 맞추며 살아낸 삶이다. 일상은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취한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착상된 일련의 작은 뭔가를 낳기도 한다.” 일상은 우리 실존이 거머쥔 실체적인 것과 상징 자본을 빨아들여 취하고 그 대신 ‘작은 뭔가’를 산출한다. 그런 운동을 되풀이하면서 내놓는 게 바로 우리 삶이다.

실내에는 섬유유연제 냄새가 희미하게 떠돈다. 그 냄새와 함께 식기세척기가 돌아가는 소음, 텔레비전에서 송출되는 빛과 음향, 간간이 의자가 끌리는 소리, 커피포트에서 물이 서서히 끓어오르는 소리, 현관 도어록 번호를 누르면 울리는 소음 따위가 섞인다. 밤엔 대체로 조용하다. 소음 발생 유발자들이 잠드는 까닭이다. 밖에서는 바람이 불고 먼 데서 나무들이 흔들리는 소리가 들린다. 소음이 잦아든 실내에선 사건 사고가 일어나는 법이 드물다. 일상의 시간에 과잉 증식하는 백일몽과 먼지처럼 부유하는 기억이 뒤섞인 채 발효가 일어날 뿐이다. 그게 일상의 평범함 혹은 민낯이다.

직장인이라면 출근과 퇴근, 사무실에서 하는 업무 등을 근간으로 일상이 짜일 테다. 사소하고 밋밋하며 진부한 리듬을 타고 흘러가는 일상을 두고 우리는 심심하고 하품이 난다고 탄식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안락한 일상이란 그 무엇과 견줄 수 없을 만큼 소중하고 숭고한 것이다. 우리 삶의 안녕과 보람은 사소한 일상을 떠받치는 견고함에 의해 가능해지는 것이다.

더는 안락한 일상을 이어갈 수 없을 때 우리는 단박에 불행에 빠질 수 있다. 우리는 그 사실을 코로나19 팬데믹을 겪으며 깨달았다. 카페와 베이커리를 무시로 드나들며 사람들과 담소를 나누고 아무 때나 여행을 떠날 자유를 앗아간 그 시절을 우리는 얼마나 숨 막히는 듯한 고통을 치르며 지나왔던가! 일상은 권태와 잠재적 위험이 빚는 반전 사이에, 즉 극과 극 사이에 오롯하게 존재한다.

싱크홀처럼 마주치는 위험태

평범한 일상은 사소하고 별다를 게 없는 하루를 빚는다. 사소한 것에 주파수가 맞춰진 채 흘러가는 하루가 모여 인생을 일군다. 우리의 내밀한 삶으로서 일상은 세계상(世界像)의 작은 조각들이다. 그 조각들을 이어 붙이면 우리 삶의 윤곽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우리의 정체성과 자아는 달걀처럼 깨지기 쉽다. 우리가 살아내는 일상은 그 정체성과 자아를 담는 바구니다. 그 바구니가 우리의 벌거벗은 생명과 자산을 지켜낼 수 없다면 우리는 늘 잠재된 불안 속에서 전전긍긍할 것이다.

일상은 형태도 윤곽도 없는 시간의 흐름을 타고 지나가지만 더러는 예기치 않은 위험을 불러온다. 문제는 아무도 그 위험을 미리 감지할 수 없다는 데 있다. 일상의 항상성에서 불거지는 위험은 우리 생명과 재산을 앗아갈 수 있다. 우리 일상을 감싼 테두리, 즉 정치와 경제, 사회 시스템에 빈틈이 있다면 사고의 위험성은 없어지지 않는다. 이를테면 도로에서 발생하는 싱크홀도 일상에 숨은 잠재적 위험태의 하나일 테다.

우리 일상은 보이지 않는 촘촘한 망에 의해 움직인다. 그 망은 자명한 일상 속에서 작동하는 안 보이는 궤도와 회로를 뜻한다. 의료와 금융 및 체신 시스템 종사자, 음식점과 카페 및 숙박업소를 꾸리는 소상공인, 새벽 현관에 신선식품을 배달하는 노동자, 쓰레기를 수거하는 환경미화원, 지하철과 대중교통을 움직이는 운전자 등이 망의 한 부분을 떠맡는다. 망의 하부 구조가 고장 나고 작동이 멈춘다면 일상 역시 덜컹거리다가 정지될 게 틀림없다.

일상의 안녕이 곧 인생의 행복

우리가 잊는 것은 일상의 안락함이 공짜로 주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우리는 일상의 안녕을 위해 기꺼이 비용을 지불한다. 국가에 납부하는 세금도 그 비용이다. 세금은 우리 일상과 생명, 자산을 지키는 데 지불한 기회비용이다. 국가 권력의 두 축을 이루는 국방과 치안 유지에 세금이 쓰인다. 이 국가 장치들이 일상을 보호하는 테두리인데, 만일 이것이 없다면 우리 생명과 재산은 물론이거니와 국가 자체의 존립도 불투명해질 것이다.

당신의 일상은 안녕한가? 삶의 실체적 국면 속에서 솟아나는 일상은 날마다 똑같은 형태와 리듬으로 흘러가는 듯하다. 사실 일상은 날마다 조금씩 차이를 품고 반복한다. 우리는 일상의 표면 위로 무심히 미끄러져 나간다. 우리는 서서히 쇠락하는 존재로서 일상의 덕목인 평범함의 견인력을 겪는다. 우리는 그 안에서 쾌락과 기쁨, 성가심과 불편을 받아들인다. 얼마간 시간이 흐른 뒤 그것이 우리가 사는 세계에 대한 신뢰와 안심을 이끌어냈음을 알아차린다. 어쩌면 우리가 갈망하는 행복이란 일상의 안녕이 모여서 일궈내는 더 큰 안녕일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