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원동에서 시작해 정동에 닿기까지...서울아트시네마의 긴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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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 응원 프로젝트: 예술영화관 이야기-6]
시네필의 안식처이자 성지 '서울아트시네마'
2002년 소격동에서 개관 후 네 차례 이전
크고 작은 부침을 겪었지만
관객과 각별한 동지애를 나누며 존속해

많은 이들에게 그렇지만 나에게도 서울아트시네마는 안식처이자 성지였다. 혼자 영화를 보는 문화가 없던 시절에도 그곳에는 나와 비슷한 영화광들이 혼자 자리를 잡고, 서로의 내공을 탐색했으며, 영화과에서도 보지 못한 영화들을 볼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었다. 그래서 아트시네마가 꿋꿋이 버텨온 것은 더더욱 고맙고 애틋하다. 그리고 그 '버팀'의 역사와 뒷이야기를 김성욱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 디렉터를 통해 들을 수 있었다.

▷ 이 특집을 통해서 현재까지 다섯개의 예술영화관 (라이카 시네마, 헤이리 시네마, 아트나인, 더숲 아트시네마, CGV 씨네라이브러리)을 순회했다. 그중 서울아트시네마는 유일하게 이전을 했던, 아니 더 정확하게는 가장 많이 이전했던 영화관이다. 어떤 이유에서였나.
개관을 2002년에 했는데, 23년의 역사에서 4번이나 이사를 했다 (웃음). 거의 유랑 극장에 가깝다. 아마 전세계 극장사에서도 유례없는 일이 아닐까 싶다. 한국에서 민간이 시네마테크를 운영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보여주는 예이기도 하다. 대도시의 영화관 운영은 부동산 경기에 영향을 받는다. 우리 같은 비영리성 문화 시설도 건물을 임대해 운영해야 하기 때문에 몇 년에 한 번씩 재계약을 해야 하고, 그때마다 임대료가 오른다. 그 과정에서 재정적인 조건에 맞춰 이사를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가장 먼저 서울아트시네마가 둥지를 틀었던 아트선재 같은 경우는 건물주가 이전을 요구한 경우였고, 그 이후 허리우드 극장은 10년 정도 머물렀으니 꽤 오래 있었다고 할 수 있지만 건물이 너무 노후한 것이 문제였다. 결국 서울극장으로 이전을 어렵게 했는데 당시가 코로나 기간 아니었는가. 서울극장도 팬더믹을 거치며 운영이 힘들어졌고 결국은 폐업을 결정해서 불가피하게 이전해야 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사를 많이 하다 보니 겪게 된 이사의 장점 같은 것은 없나 (웃음).
그런 것은 절대 없다 (웃음). 서울극장에서 현재의 정동으로 오기까지의 과정은 쉽지 않았다. 극장을 할 만한 장소를 찾기도 쉽지 않았지만, 최근에는 모든 극장이 디지털 상영으로 바뀌어 35mm 필름 영사기를 구비하고 영사실을 새로 마련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다. 오히려 새로 짓는 것이 아니라면 이전은 정말 힘든 일이다. 코로나 덕분에(!) 옛 시절의 영사실을 갖춘 정동극장이 문을 닫고 방치됐기에 이전할 수 있었다. 비영리 법인은 대출도 받을 수 없던 탓에 스크린을 새로 설치하고 좌석을 교체하는데 필요한 비용을 마련하기 어려웠다. 다행히 몇몇 배우와 감독들을 포함한 '시네마테크의 친구들'이 후원을 해줬기에 가능했다. 마지막에 정동이라는 공간을 찾지 못했더라면 정말 포기를 해야 하나 싶었던 적도 있었다.
민간이 만든 비영리 극장이라고 보면 된다. 일반적으로 해외의 경우에도 '아카이브'라는 명칭이 들어간 곳은 대부분 국립이지만, 시네마테크는 시네마테크 프랑세즈를 포함해서 개인이나 단체, 협회부터 시작해 극장을 설립한 역사를 지닌 민간 비영리 극장이다. 그래서 공적 지원이 있더라도 '독립성'을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 서울아트시네마의 시작이라고 하면 1990년대 비디오테크 시절부터 이야기해야겠지만, 2002년에 문화학교 서울, 서울시네마테크, 퀴어아카이브, 그리고 전국 도처에 존재했던 15개 시네마테크 단체들이 연합해 '사단법인 한국시네마테크협의회'를 설립한 것을 시초로 보면 될 것 같다. 이후 소격동에 있는 아트선재센터 아트홀을 임대해 서울아트시네마를 개관했다.
▷ 서울아트시네마는 소격동, 낙원동, 종로 3가, 정동까지 서울의 심장부를 순회한 셈인데, 현재까지 어느 동네가 가장 마음에 드는지.
낙원 시절(2005~2025)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영화를 보고 나와 옥상에서 하늘을 올려다보고 인사동 거리를 내려다보면 마음이 편해졌다. 영화는 안 보고 낙원 옥상에만 오던 관객도 있었다. 현재의 정동도 주변 환경이 좋아 마음에 든다. 사실 극장이라는 공간은 '산책'이 수반되면 이상적이다. 영화를 보고 나오면 바로 엘리베이터를 타야 한다든지, 쇼핑몰을 거쳐야 한다든지 하면 영화의 감상이 깨지기 십상이다. 현재의 정동은 영화를 보고 지하철이나 버스 정류장까지 길을 걸어가며 영화에 대한 감상을 이어 나갈 수 있는 곳이다. 그 길을 걸으면서 본 영화에 대해 생각하고 그 정서를 유지하고, 대화를 나누기에 정말 좋은 위치인 것 같다.
▷ 모든 예술영화관이 저만의 기획전과 특별전을 하고 있지만 서울아트시네마를 생각하면 아무래도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어쩌면 서울아트시네마의 중추처럼 느껴질 정도로 아트시네마의 정체성과 역사를 잘 보여주는 영화제인 것 같다. 이 영화제는 어떻게 탄생했는가.
2006년도에 처음 시작했다. 곧 20주년을 앞두고 있다. 아트선재 시절(2002~2005)에 회고전과 기획전 때 영화를 자주 보러 오는 감독들이 많았다. 박찬욱, 김지운, 오승욱, 류승완 등 극장을 자주 찾던 단골들이 있었는데, 자주 보다 보니 자연스럽게 행사나 토크 같은 것에 이 감독들이 참여하게 됐다. 박찬욱·오승욱 감독과는 로버트 알드리치 특별전을, 김지운 감독과는 장 피에르 멜빌 특별전을, 류승완 감독과는 버스터 키튼 특별전 행사를 같이한다던지 말이다.
이후 아트선재에서 나오게 되면서 극장의 안정성 그리고 지속성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하게 됐다. 그때 이 공간을 유지하기 위해서 감독들이 후원을 자청했다. 후원도 하고 관객의 참여도 도모하는 형태, 그러니까 후원 영화제의 성격으로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가 시작했다. 2007년부터는 박찬욱 감독이 말했던 '오래된 영화를 위한 새 공간'을 마련하기 위한 캠페인의 일환으로 영화제가 지속됐다. 처음에 친구들 영화제의 멤버가 7명 정도로 시작했는데, 현재는 매년 열 명 이상의 친구들이 참여하고 있다. 초기 멤버들은 거의 그대로 현재도 참여해 주고 있다.
여전히 영화를 극장에서 보기를 즐기는 관객들이 대부분이다. 이들이 통상적으로 생각하는 ‘지독한 시네필'의 이미지와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영화는 평범한 이들의 예술이다. 코로나19 사태 이후로는 눈에 띌 정도로 이십 대 젊은 관객들이 많아졌다. 해외 관계자들과 이야기를 나눠보면 한국뿐만이 아닌 전세계적인 추세인 것 같다. 젊은 관객들은 늘 새로움을 찾는다. 최근에는 그들이 최신 영화뿐만 아니라 고전영화에 관심을 보이는 것이 새로운 현상이다.
실제로 지난해 관객들이 늘었고, 최근에 관객 회원도 두 배로 증가했다. 코로나 기간 동안 인터넷과 다른 플랫폼을 통해 유산 영화에 대한 관심이 되살아났다. 젊은 세대가 이전 세대보다 요즘은 영화 유산에 더 많이 접근하고, 극장을 찾고 있다. 클래식 영화만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웹 매거진도 많아졌다. 여전히 극장이 취약한 상황이긴 하지만, 클래식에 대한 새로운 세대의 관심에 호응할 만한 영화 정책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이 가장 생각난다. 아트선재 시절, 2004년에 구로사와 감독의 첫 회고전을 진행했다. 구로사와 감독은 자신의 데뷔 20주년 행사를 해외에서 처음 해줬다고 말했다. 낙원 허리우드 극장으로 이전해서도 구로사와 감독을 '친구들 영화제'에 초청했는데 그때 봉준호 감독과 토크를 했다. 서울극장 시절에도 방문을 했으니, 구로사와 감독은 우리가 옮긴 모든 극장을 방문한 유일한 감독이다 (웃음). 아직 정동은 와보지 못하셨는데 이제 또 그를 초청할 때가 되지 않았나 싶다 (웃음).
▷ 아트시네마의 프로그래머 포지션으로 이제는 거의 인생의 반을 살아오지 않았는가. 마지막으로 드리고 싶은 질문은 다시 태어나도 같은 직업을 택할지에 대한 질문이다. 적지 않은 어려움과 부침이 있었어서 왠지 다음 생에서는 안 할 것 같은 예감이다 (웃음).
극장 일이 연속적이었다고는 할 수 없다. 매번 이전을 할 때마다 다시 백지상태에서 시작하는 느낌이었다. '집을 짓는 데는 1년이 걸리지만, 불태우는 데는 30초도 걸리지 않는다'는 진부한 표현이 사실이다. 매번 다시 시작하고 갱신하는 느낌이 더 컸다. 이런 과정이 물론 지치지 않는 일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이걸 다시 하겠느냐고 묻는다면 내 대답은 '그렇다'이다.
예전에 제안을 받아 써보려고 했던 책의 제목이 '영화관을 하지 않았다면 몰랐을 영화 이야기'였다. 영화관을 통해 영화에 대한 다양한 생각을 갖게 됐다. 물론 영화관 없이도 영화를 볼 수는 있지만, 그건 카페 없이 커피를 마시는 것과 비슷하다. 카페를 가고 서점을 찾듯이 사람들은 영화관을 방문한다. 다른 영화관은 모르겠지만, 시네마테크는 오래된 영화를 상영하는 곳이고 아직도 필름 상영을 하는 곳이니, 더는 극장을 찾는 사람이 없을 때까지 영화를 상영하게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물론 영화관 운영에는 돈이 들고, 그래서 서울아트시네마도 도움을 준 여러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존속할 수 있었다.
인터뷰의 서문에서 서울아트시네마를 생각하면 '애잔함'이 크다고 했는데 궁극적으로는 인터뷰를 마치고 나서도, 그리고 이 글을 마무리하면서 그 애잔함은 더 커졌다. 이는 단순히 극장이 이전을 거듭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서울아트시네마는 (수많은 이들과 함께) 내가 유년과 청년 시절을 함께 했던 곳이고, 극장이 그랬던 것처럼 나 또한 크고 작은 부침을 겪고도 어떻게든 버텨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트시네마는 영화를 사랑하는 모든 이들, 그리고 그것을 업으로 삼은 이들의 삶을 형상화한 공간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동시에 서울아트시네마와 관객이 나누고 있는 이러한 각별한 동지애(camaraderie)는 궁극적으로 영화관이 추구해야 할 덕목이기도 하다. 아트시네마에는 늘 좋은 영화와 동지들이 가득하다. 그리고 그것은 누벨바그의 멤버들이 그랬듯, 세상을 바꾸기에도 충분한 동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