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소연의 시적인 순간] 봄날의 어른 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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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A31
미움에 에너지 소비하는 우리
진짜 어른은 남 헤아려주는 사람
이소연 시인

“갑자기 이불은 왜요?”
“봄이니까.”
이불엔 관심도 없다던 아들이 한참 고심해 고른 이불은 하늘색 차렵이불이었다. 점원이 침대 위에 색색의 이불을 펼쳐 보일 때마다 환해지는 표정을 보니, 꾹 닫힌 아들의 가슴까지 봄기운이 들이치는 모양이다.
중학생 아들 방은 남편과 내가 사들인 책으로 가득하다. 그뿐인가. 옷장이나 서랍장도 자기 것이라고 하기에는 애매할 만큼 부모의 물건으로 채워져 있다. 자신만의 공간이 간절할 만도 하다. 봄맞이 대청소는 그렇게 시작됐다. 기왕에 싱크대도 바꾸고 안방에 붙박이장도 새로 놓기로 했다.
“엄마, 오늘부터 덮어요?”
공사 끝나면 새 이불 꺼내 덮자고 한 뒤로 아들이 하루하루 손꼽아 기다린 날이 왔다. 이토록 애탈 일인가 싶어 피식 웃음이 났다.
“이불에 관심 없다며?”
“이불 사는 건 처음 해봤잖아요.”
이불 하나만으로도 이렇게 설레는 아이는 언제까지 계속될까? 오늘 들은 이 말이 봄이 아닐 리 없다. 봄은 내 것으로 채우는 일이 아니라 자리를 내어주고 처음을 내어주는 일이라는 걸 알겠다.
탄핵 이후, 김장하 선생님의 이름이 다시 회자되고 있다. 탄핵을 선고한 문형배 헌법재판관이 김장하 선생의 장학생이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어른 김장하’라는 다큐멘터리 영화를 다시 봤다. 평생을 자동차 한 대 없이 살아온 어른, 김장하. 윤슬이 가득한 진주 남강은 그를 가장 평범한 사람이라고, 그러나 가장 위대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어떻게 하면 가장 낮은데 가장 높은 삶을 살 수 있을까. 한결같이 인권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 외진 곳을 들여다보는 사람. 평범한 사람이 사회를 지탱한다고 믿는 사람. 평범한 것이 비범함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 ‘어른’이란 말을 곱씹어본다. 어른. 사전적으로는 다 자란 사람이란 뜻이다. 이 자명한 사실을 의심하게 된다. 나는 다 자란 사람인가? 다 자란 사람이라고 하기엔 나는 누군가를 미워하는 데 너무 많은 에너지를 쓴다. 그리고 너무 쉽게 억울해한다.
어른 김장하에서 기억에 남는 한 장면을 꼽으라면, 전화로 자신을 모함하고 욕하는 사람의 말을 끝까지 듣는 장면이다. 그는 화내거나 언성을 높여 따지지 않고 상대방의 말을 끝까지 들은 다음 조용히 전화기를 내려놓는다. 나라면, 내 입장은 이렇다 저렇다 하면서 분통을 터트렸을 텐데 말이다. 어른은 제 생이 고생한다고 푸념하지 않고, 남의 입장을 헤아려주는 사람이다.
내가 아이를 낳고 힘들어할 때였다. 시아버지는 삐뚤삐뚤한 글씨로 나에게 편지를 썼다. “아가, 네가 애쓴다. 그 마음 잘 안다”고 시작하는 편지였다. 편지와 함께 시골에서 쌀이 올라와 있을 때, 눈물이 났다. 뭐든지 해주고 싶은 마음, 그러나 도와주지 못하는 마음이 글에 담겨 있었다. 가르치는 대신 삶을 알아가는 나를 헤아리는 말들이었다. 아이를 키우면서 세상을 읽게 됐고 부모 마음을 알게 됐고 어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조금 알게 됐다. 그래서 기쁘다. 봄날, 어른 되기는 아이 방을 가득 채운 내 물건들을 치우면서 시작이다. 자신만의 공간을 갖고 싶다는 사춘기 아들의 마음을 헤아리는 내가 나도 필요했다. 들어주는 것만으로 어떤 사람은 살아갈 힘을 얻는다. 누군가의 말을 끝까지 들어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나는 늘 평범한 삶을 꿈꾼다. 그런데 집을 사고, 차를 사고, 책도 서너 권 내니까 자꾸 욕심났다. 그런 나를 꾸짖듯 정현종의 ‘한 숟가락 흙 속에’란 시가 눈에 들어온다. 그 안에 “미생물이 1억5000만 마리”가 살고 있단다. 미생물의 삶을 안다면 나는 어른이 돼 있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