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수첩] '강제노동' 오명 쓴 한국, 손 놓은 인권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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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선 권고 알리지 않고 '방관'
중국·소말리아 수준으로 전락
정희원 사회부 기자

미국 관세국경보호청(CBP)이 지난 3일 전남 신안군 태평염전 천일염에 대해 “강제노동이 의심된다”며 수입 보류 조치를 취한 것을 두고 정부의 한 통상당국 관계자가 이같이 말했다.
이번 조치는 공익법센터 ‘어필’ 등 인권 관련 시민단체가 2022년 11월 CBP에 제출한 수입 보류 청원서에서 시작됐다. 청원서에는 2014년 ‘신안 염전 노예’ 사건과 2021년 ‘태평염전 장애인 무임금 노동 착취’ 등 관련 언론 보도 및 피해자 진술이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CBP가 관련 실태 조사나 소명 절차 없이 해당 청원을 그대로 인용하면서 곧바로 수입 보류 명령이 내려졌다.
인권위는 2014년과 2021년 관련 사건들이 불거지자 현장 조사를 하고 개선 권고를 내렸다.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도 이에 따라 다양한 재발 방지 대책 마련에 나섰다. 전라남도는 2021년부터 도내 염전 노동자에 대한 실태조사와 현장 점검을 매년 시행하고 있다. 일부 지역에는 전담 공무원을 지정해 관리 체계를 강화했다. 경찰청은 신안에 경찰서까지 추가로 개설했다.
이처럼 관련 대책이 속속 현실화했지만 정작 인권위는 이를 알리기 위한 노력을 전혀 하지 않았다. 인권위 관계자는 “국내 시민단체들이 CBP에 수입 금지 청원을 낸 사실은 사전에 알고 있었다”면서도 “이들이 인권 관련 국제기구가 아니라 개별국 정부에 문제를 제기한 만큼 소명에 적극적이지 않았던 것”이라고 해명했다.
이미 수입 금지 조치가 시행된 상황에서 사후 대응이 얼마나 실효성을 지닐지는 미지수다. 21세기 들어 미국이 인권을 명분 삼아 동맹국을 상대로 수출 제재를 내린 첫 사례라는 평가도 나온다. 한 통상 전문가는 “CBP는 노동법뿐만 아니라 인권 관련 행정명령을 근거로 수입을 막을 수 있어 앞으로도 비슷한 사례가 계속 나올 수 있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이번 조치가 갖는 의미는 경제성보다 상징성에 있다. 태평염전은 국내 최대 염전으로 국내 천일염 연간 생산량(20만8197t)의 6%(1만2500t)를 차지할 정도로 규모가 크다. 다만 대미 수출량은 연간 7~8t(약 1억원)으로 미미한 수준이다. CBP가 제재 대상으로 삼은 주요 품목에는 중국 신장위구르산 면화, 소말리아산 유향 등 인권 침해가 의심되는 권위주의 국가들의 생산물이 포함돼 있다. 아시아 민주주의 모범 국가를 자처하는 한국이 이들 국가와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된 셈이다.
인권위가 앞으로 이 같은 국가 망신이 반복되지 않도록 관련 시스템을 점검할 필요가 있다. 소는 잃었지만 외양간이라도 고쳐야 하지 않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