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과 욕망 사이…연극 입은 오페라 '파우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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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우스트
샤를 구노의 오페라를
연극과 접목해 재해석
다채로운 성악가들 목소리와
정동환 노련한 연기 돋보여

괴테의 희곡을 바탕으로 각색한 샤를 구노의 오페라 ‘파우스트’는 ‘악마는 우리 주변 어디에나 존재할 수 있다’는 경고를 전한다. 서울시오페라단은 지난 10일부터 13일까지 서울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파우스트를 오페라에 연극을 접목한 ‘오플레이’ 무대로 선보였다.
막이 오르고 늙은 파우스트 역의 배우 정동환이 가슴을 찌르는 듯한 목소리로 인생의 덧없음을 토해낸다. 문학과 철학, 의학과 연금술까지 두루 섭렵한 파우스트의 복잡한 내면이 노련한 배우의 밀도 높은 연기를 통해 펼쳐지자 객석에서는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뒤이어 나올 성악가가 정동환과 비교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잠시, 이후 장면들은 기대를 뛰어넘었다.
이번 공연에서 가장 압도적인 존재감을 발휘한 인물은 A팀의 메피스토펠레스 역을 맡은 베이스바리톤 사무엘 윤이다. 간사한 유혹자부터 파멸을 이끄는 냉혹한 악마까지, 3시간의 오페라 내내 다채로운 표정과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역할을 소화했다. 2011년 국립오페라단의 파우스트에서 메피스토펠레스 역을 맡은 미국 출신의 베이스 사무엘 레미와 비교해도 빠짐이 없었다. 사무엘 윤은 오플레이를 표방한 이번 무대에서 연기와 가창 모두 진가를 발휘했다.
11일 B팀 공연에서 발랑탱 역의 바리톤 김기훈과 12일 A팀 공연의 마르그리트를 노래한 소프라노 손지혜도 인상 깊은 무대를 선보인 성악가다. 김기훈은 깊은 호흡에서 나오는 단단한 발성과 극의 내용에 맞는 섬세한 감정선의 연기를 선보이며 강렬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손지혜는 ‘보석의 노래’부터 5막 3중창까지 흔들림 없는 음정과 단단한 고음으로 노래하며, 독일 도르트문트 오페라극장에서 주역으로 활약하며 쌓은 기량을 아낌없이 발휘했다.
무대 디자인은 신재희가 맡았다. 그는 2024년 대전 예술의전당 ‘운명의 힘’ 무대 위에 거인 시지프스를 세우며 강렬한 인상을 남긴 바 있다. 오페라의 첫 가사인 프랑스어 ‘Rien’(헛되다)이 새겨진 무대 좌측에는 신을 뜻하는 ‘Dieu’, 우측에는 악마를 뜻하는 ‘Démon’이 각인됐다. 순수한 영혼의 여인 마르그리트는 무대 왼편, 메피스토펠레스는 오른편에서 등장해 인물의 성격과 상징이 무대 구조 자체로 시각화됐다.
연출을 맡은 엄숙정은 연극적 요소를 전면에 내세웠다. 특히 3막에서 마르그리트가 ‘보석의 노래’를 부를 때와 4막 교회의 부서진 십자가 앞에서 펼쳐지는 ‘얼굴 가린 사탄’ 군무 장면은 참신한 시도였다. 이 장면은 지난해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나비부인’에서 소프라노 아스믹 그리고리안과 함께 공연한 영국 마리오네트 인형극단 ‘블라인드 서밋 시어터’의 연기를 떠올리게 했다.
다만 극적 효과를 위해 삽입한 군무 중 일부는 음악 감상에 방해가 됐다. 시선을 사로잡는 동작이 소프라노의 노래에 빠져들어야 할 순간을 흐트러뜨렸다. 성악가들의 집중력이 분산될 수 있을 것이란 걱정도 들었다.
괴테의 철학적 서사를 음악과 연극적 요소로 입체화한 이번 파우스트는 실험과 고전이 조화를 이룬 무대였다. 서울시오페라단은 2022년 박혜진 단장 취임 이후 정기 공연마다 새로운 시도를 거듭하며 한국 오페라의 한계를 확장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조동균 기자 chodog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