겹겹이 덧입혀진 붓질이 자극하는 기억 저편의 기억

프랑스 파리 출신 장 밥티스트 베르나데
국내 첫 개인전 'Belvedere'

클래식 음악 형태 닮은 Fugue 시리즈
신작 18점 가나아트 한남서 5월 8일까지

작은 붓으로 전체 화면 채워 완성
인상파 화가 색채 및 기법 연상케하기도
봄날의 햇살, 달큰한 솜사탕, 갑자기 뜬 무지개, 흩날리는 벚꽃 내음…. 프랑스 파리 출신의 작가 장 밥티스트 베르나데(Jean-Baptiste Bernadet)의 그림은 기억 저편에 숨어 있던 포근한 장면들을 떠오르게 한다. 눈으로 보는 것을 넘어 맛과 향, 소리까지 머릿속에 번진다. 추상화와 풍경화 사이를 넘나드는 작가는 겹겹이 붓질을 쌓아 올려 색채와 감각, 기억, 시간의 흐름을 탐구한다.
Untitled(Fugue), 2025, Oil and cold wax on canvas, 85 x 150 cm, photo by UsefulArt Service. /가나아트 남
Untitled(Fugue), 2025, Oil and cold wax on canvas, 85 x 150 cm, photo by UsefulArt Service. /가나아트 남
벨기에 브뤼셀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는 장 밥티스트 베르나데의 국내 첫 개인전 ‘Belvedere’가 가나아트 한남에서 5월 8일까지 진행된다. 2023년 키아프 서울(Kiaf Seoul) 이후 한국 관람객에게 선보이는 두 번째 자리다. 이번 전시에서 그의 대표 연작 푸가(Fugue) 시리즈 신작을 만날 수 있다.
전시장 입구 쪽에 설치한 작가의 드로잉 연작 Gray Matters. /가나아트 한남
전시장 입구 쪽에 설치한 작가의 드로잉 연작 Gray Matters. /가나아트 한남
리듬을 그리는 손, 음악처럼 흐르는 화면

푸가 시리즈는 클래식 음악의 형식을 닮았다. 한 음 한 음 선율이 차곡차곡 쌓이며 완성되는 푸가처럼 그의 회화는 붓질 하나하나가 겹겹이 더해지며 형태를 이룬다. 멀리서 보면 저녁 노을이 번지는 황혼 같기도 하고, 어스름한 새벽을 깨우는 여명의 풍경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서면 화면을 가득 메운 일정한 크기의 브러쉬 스트로크가 눈에 들어온다.
Untitled(Fugue), 2025, Oil and cold wax on canvas, 85 x 150 cm, photo by UsefulArt Service. 작가느 대부분의 작품에 노란색을 사용하지만 이 작품에는 노란색이 없다. 그래서인지 작가는 이 작품에 괜스레 애착이 간다고 말했다. /가나아트 한남
Untitled(Fugue), 2025, Oil and cold wax on canvas, 85 x 150 cm, photo by UsefulArt Service. 작가느 대부분의 작품에 노란색을 사용하지만 이 작품에는 노란색이 없다. 그래서인지 작가는 이 작품에 괜스레 애착이 간다고 말했다. /가나아트 한남
그는 매번 같은 크기의 붓을 쥐고 같은 동작을 반복한다. 작은 붓 하나로 전체 화면을 채워나간다. 단순하고 기계적인 행위처럼 보이지만, 그 반복 속에서도 미묘한 변주가 나타난다. 그가 즉흥적으로 쌓아 올린 붓 터치는 질서와 우연이 교차하며 시각적 리듬을 만들어내고, 각 작품은 독립적인 동시에 그의 전체적인 작업 세계를 이루는 하나의 조각이 된다.

라틴어에서 유래한 푸가는 ‘도망치다’와 ‘쫓다’라는 상반된 의미를 동시에 지닌다. 그래서일까. 선율은 서로를 밀어내고 쫓으며 교차하고, 결국 하나의 구조를 완성한다. 작가는 이런 역동성과 리듬을 캔버스 위에 표현했다. 어느 선율이 언제 어디를 쫓아가는지 집중해서 듣게 되는 푸가처럼 그의 작품 역시 들여다 볼수록 점점 깊이 빠져들게 된다.
가나아트 한남에서 진행 중인 장 밥티스트 베르나데의 국내 첫 개인전 ‘Belvedere’ 전시장 전경. /가나아트 한남
화려한 색채감이 돋보이는 그의 작품은 높은 층고와 새하얀 벽의 가나아트 한남과 특히 잘 어우러진다. 작가는 이번 전시 구성에 의견을 보탰다. 보통 사람들의 시선보다 낮은 위치에 그림을 걸고, 네 개의 연작을 벽면에 일렬로 붙여 배치하자는 아이디어를 제시했다. 전시장에서 만난 작가는 “작품들을 나란히 붙여놓으면 절대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반복과 변주들을 효과적으로 보여줄 수 있을 것 같았다”며 “스피디한 움직임과 리듬이 잘 표현돼 만족스럽다”고 설명했다.
장 밥티스트 베르나데의 국내 첫 개인전 ‘Belvedere’. 각자 따로 작업한 작품이지만 일렬로 배치해 작품의 리듬감을 극대화했다. /가나아트 한남
말하지 않는 작품, 감정을 일깨우는 색

그의 작품은 배경을 다양한 컬러로 번지듯 채우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 후 겹겹이 붓 터치를 쌓는다. 알키드와 콜드 왁스를 섞어 수채화처럼 아주 얇게 표현해 레이어들이 쌓이며 컬러가 섞이고 새로운 형태가 나타난다. 작가가 초반에 구상했던 모습이나 의도는 쌓이는 붓 터치 아래서 흐려진다.
프랑스 파리 출신의 작가 장 밥티스트 베르나데(Jean-Baptiste Bernadet). /가나아트 한남
작가가 무엇을 그렸다 한들 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아예 새로운 풍경으로 보이기도 한다. 특히 이 과정에서 형상이나 제스처, 노동의 흔적이 드러나지 않도록 조율한다. 화면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최소화하려는 의도다. 작가는 모든 작품이 어떤 특정한 감정이나 장소, 순간을 그린 것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관람자 각자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환상적인 장면을 마주했을 때 떠오르는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싶어요. 그림이 무엇을 말하는지 고민하기보다는, 각자가 자신의 방식으로 감상하고 해석할 수 있는 회화를 그리고 싶습니다.”

강은영 기자 qboo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