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상을 해부하는 화가 이상남 "말이 되지 않는 것, 말이 되게 만들었죠"

[이진섭의 음미(美)하다] 화가 이상남 인터뷰

기하학적 추상의 대가 이상남과
이상적(理想的) 만남

뉴욕서 시각적 매체와 페미니즘 제3세계 문화 등
다양한 데이터 축적하며 실험 회화 시작해

故 박서보 화백의 1대 제자
자기 관리와 치밀한 데이터 수집 등 배워
이상남 스튜디오. / 사진. ⓒ이상남
이상남 스튜디오. / 사진. ⓒ이상남
자신이 만든 기하(호)적 언어로 ‘추상을 실험하는’ 화가 이상남은 우리를 상상하게 한다. 아마도 시인 ‘이상(李箱)’의 <오감도>와 <선에 관한 각서>가 회화적 환생을 거쳐 다른 차원으로 펼쳐진다면, 이상남의 <마음의 행태(Form d’esprit)>가 될 것 같다. 그의 작품을 한 번도 보지 않은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본 사람은 없을 것이다.

故 박서보 화백의 1대 제자인 그는 1980년대 초반 미국 뉴욕으로 떠나 자신만의 회화적 방법론을 찾으려 고군분투했다. 그의 나이 스물일곱이었다. 당시 예술과 문화의 최정점이었던 뉴욕 한복판에서 그는 무용, 영화, 공연 등을 자신만의 시각언어로 체화했다. 낯섦에서 오는 것들이 작품 활동에 많은 도움을 줬다고 한다.

이상남의 회화는 현실과 동떨어진 추상이라기보다 대위법으로 하나의 주제를 완성해가는 교향곡 같다. 수많은 도형과 아이콘의 숲을 헤매다 보면 관객은 자신에게 최적화된 감정을 마주하게 된다. 음악처럼, 건축물처럼, 때론 수수께끼처럼 그의 작품을 여행하듯 감상한다. 이상남은 “관객들이 그것을 자의적(恣意的)으로 조직하고 재구성하면서 각자의 의미를 만들어가면 좋겠다”고 했다. 작품과 관객의 경험이 하이퍼텍스트로 재창조될 때, 그가 구축한 추상의 알고리즘은 다른 차원의 회화적 경험을 선사한다.

“침묵 속에서 나를 발견한다”고 한 그는 50년 넘게 시각적 데이터를 축적하고, 회화언어의 체계를 구축했다. 매일같이 회화언어를 조합하고, 문맥으로 만드는 작업을 통해 구도자의 길을 걷는다. 그는 자신을 실험가이자, 연구자라고 했다. 봄바람 휘날리는 4월 어느 날, 미술관 전시 준비를 위해 잠시 뉴욕에서 한국으로 넘어온 화가 이상남과 이상적(理想的)인 만남을 가졌다.
화가 이상남. / 사진. ⓒ이상남
화가 이상남. / 사진. ⓒ이상남
▷ 최근에 어떻게 지냈는지.
매일 그리고 연구했죠. 뉴욕에 거주하면서 작업하고 있는데, 미술관 전시 준비로 한국에 잠시 들어와 있습니다.

▷ 1980년대 뉴욕으로 건너가 치열하게 살았던, 그 시절 이야기가 궁금합니다.
처음 무작정 뉴욕에 가서 저도 많이 굶주렸습니다. 생활도 그랬지만, 예술에 대한 굶주림도 컸습니다. 그때는 회화보다 영화, 연극, 무용을 많이 봤습니다. 제 작업의 움직임 요소가 있다면, 거기서 온 거라고 볼 수 있죠.

80년대에는 이스트빌리지에 살았어요. 지금은 소호 부근에서 삽니다. 당시에는 이스트빌리지가 집세가 쌌고, 아티스트들도 많이 살았어요. 여기저기서 물감칠하고, 실험하고 소란스러웠습니다. 스튜디오 타입의 널찍한 공간과 작품을 옮길 수 있는 리프트가 있는 곳이 필요했는데, 이스트빌리지에 적당한 곳이 있어서 터전을 잡았습니다.

▷ 다양한 사고와 문화가 작품의 근저에 있는 듯합니다. 다다이즘과 맞닿아 있는 것 같기도 하고요.
뉴욕이 좋은 게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이 있다는 거예요. 당시에는 돈이 없으니까 그곳을 자주 갔습니다.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하고, 입장료를 안 내도 되니까. 조그마한 스케치북 가지고 미술관에 들어가거든요. 그 안에서 이슬람, 이집트, 인도 등 다양한 문화권의 ‘원’을 연구하고 그려봤어요. 인간이 '원'을 가지고 할 수 있는 모든 걸 연구할 수 있었으니까 재밌었죠. 그때는 컴퓨터가 없어서 쉽게 찾을 수 없으니까, 저만의 데이터를 쌓은 거죠. 뉴욕에는 엄청난 양의 잡지가 쏟아져 나오니까 그런 매체도 자주 접하고.

저는 칸딘스키보다는 뒤샹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데이터를 많이 수집하다 보니 다양한 실험을 할 수 있게 되었고요. 실험적인 것부터 클래식한 것까지 살펴보니까, 예전에는 수직적으로 의미를 부여하던 게 흥미가 없어지고, 수평적으로 바라보게 되더라고요.

작년 페로탕에서 개인전 할 때 기자들에게 이렇게 말했어요. “보시는 작품들은 연도순이 아니라 그 순서를 섞어서 흐트러트린 상태로 전시한 것입니다. 현장에서 보는 작품 그 자체가 바로 당신들의 지금이라고(Here Now).”
이상남, &lt;4-Fold Landscape L138, Acrylic on Panel &gt;, 2016. / 이미지출처. ⓒPKM Gallery
▷ 1980년대는 신디 셔먼 같은 작가들이 현실을 회화적으로 구성했을 때고, 한국의 단색화는 뉴욕 시장에서 인지도가 없었던 시기입니다. 이 당시 생존 전략이 있다면.
뉴욕에 오기 전까지 저는 미니멀리즘과 컨셉츄얼아트를 추구했는데, 뉴욕에 오자마자 충격을 받았습니다. 아무도 그런 그림을 그리지 않았고, 제 포트폴리오도 통하지 않았습니다. 뉴욕에선 영화와 뮤직비디오 등 온갖 시각 매체가 터져 나왔고, 페미니즘과 제3세계 문화도 예술계에서 좋은 주제가 되었습니다. 처음에 그래서 힘들었어요. 내가 했던 것이 통하지 않으니까.

표현과 추상의 회화로 제 작품의 중심을 옮기는 과정에서 붓과 물감으로 뭘 그려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그러다가 점 하나 찍고, 삼각형·사각형·원에 대해 연구를 하면서 시작하게 된 거죠. 회화적 접근을 해야 하니까 처음부터 다시 도구에 대한 연구, 재료학 등을 공부했어요. 그때가 스물여덟이었습니다.

서정적인 회화에 익숙한 사람이 봐서는 쉽게 풀리지 않는 실험 회화를 하다가 운 좋게 적절한 시기를 만났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이 무르익고 있었고 회화를 보는 관점이 다양해지던 시기를 만난 거죠. 어떤 재료가, 어떤 주제가 되었든 ‘말이 되지 않은 것을, 말이 되게 만들어 가는 걸’ 지속해서 밀어붙였어요. 초지일관 밀고 나가니 영역이 확장되더라고요. 그러다가 PKM 갤러리도 만났고.

▷ PKM 갤러리와의 오랜 인연은 그때부터였던 거네요.
PKM 갤러리 박경미 대표에게 고마운 게 작품이 팔리든 안 팔리든 작가를 묵묵히 기다려주고 격려해줬어요. 덕분에 20년 가까이 회화와 기하학적 추상을 연구하고 공부할 수 있었죠. 제 작품들은 규모가 커서 창작 과정에서 에너지 소모가 상당해요. 그런데 이런 믿음과 지원이 작업을 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 故 박서보 화백의 1대 제자시죠. 좋은 스승과 제자는 정신적인 유대도 대물림되는 것 같은데, 박 화백에 받은 영향은 무엇인지.
선생님을 통해서 현대 미술로 입문하게 되었고, 소위 예술가가 지녀야 할 태도와 정신 등을 배웠어요. 예술가들이 자유분방해서 자신을 컨트롤하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자신을 관리하는 방법, 치밀한 자료 수집, 작업에 임하는 자세, 프로페셔널리즘에서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포트폴리오를 어떻게 구성해야 하는지, 재료를 어떻게 다루는지에 대한 기본적인 감은 선생님의 조수로 일하면서 익혔는데, 당시에는 제가 미니멀리즘이나 컨셉 아트 작업을 했지, 회화작업은 하지 않았을 때라 뉴욕에 와서 회화 작업을 할 때 그 시절 익힌 것들이 많은 도움이 됐죠.

▷ 기하학적 추상에 대해 ‘추상을 해부하는’ 것이라고 하셨는데, 선생님의 추상의 근저에는 어떤 것들이 존재하나요?
‘추상을 추상화(抽象化)한다’라는 게 추상을 해부한다고 생각할 수 있죠. 소위 연구하다 보면 긴 침묵 속에서 나와 만나잖아요. 구체적인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만 접근할 뿐이죠.
이상남, &lt;4-Fold Landscape (Polygon E), Watercolor and Colored Pencil on Paper&gt;, 1993. / 이미지출처. ⓒ이상남
▷ 시인 이상의 <오감도>와 <선에 관한 각서>를 보면, 시를 구성하는 문자가 시각·공간·회화적으로 다르게 다가오잖아요. 선생님의 작품 <마음의 행태>의 수많은 도상도 관객에게 음악이나 수수께끼처럼 다가오는 것 같아요. 이를 통해 무엇을 표현하고 싶었는지 궁금합니다.
이상이 언어의 추상성을 시스템화 시켰다면, 저는 무수히 흐트러져 있는 아이콘을 시스템화했습니다. 수백 개가 넘는 아이콘을 제가 드로잉하면서 언제든지 내가 사용할 수 있게 데이터를 만들어 놓은 거죠. 수많은 아이콘을 중첩시키고, 갈아버리고, 다시 또 중첩시키고…. 그래서 평면적이지만 입체적으로 보이고, 아이콘들이 조소적으로 보이고, 때론 회화적으로 다가옵니다. 이 그림을 본 어떤 관객이 이렇게 얘기하더군요. “긴 여정(Long Journey)”이라고.
이상남, &lt;Light + Right M 096, Acrylic on Panel&gt;, 2013. / 이미지출처. ⓒPKM Gallery
▷ 하나의 작품을 작업하는데,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리나요?
작품 하나당 3~4개월 정도 걸려요. 매일 9시부터 6시까지 작업합니다. 직장인들처럼요. 루틴이 중요하죠. 매일같이 회화 언어를 조합하고, 시도하고, 실험하는 거죠. 그림마다 차이는 있지만 15가지 기법들을 갖다가 씁니다. 칠하고, 문지르고, 덧대고, 구상하고…. 루프 같아요. 예전에는 7일 내내 그렸는데, 요즘은 쉬는 것도 일의 일부분이라고 생각하고 주말에는 주로 운동하고 가족과 시간 보냅니다.
사진출처. ⓒ이상남
▷ "미술과 디자인, 회화와 건축, 아날로그와 디지털, 합리와 비합리,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그 사이를 산다"고 했습니다. 현재 이상남이 건드는 샛길에는 무엇이 있는지, 그리고 이상남에게 포용은 무슨 의미인가요.
사실 지금이 즐거워요. 저희가 지금 대화를 하는 게 이 순간도요. 순간순간이 의미가 있고, 끊임없이 의심하고 틀을 깨려고 하는 게 내가 가지고 있는 즐거움인 것 같아요. 사건에 내가 빠져 있다기보다 관망하는 게 재밌는 것 같아요.

▷ 관객들에게 어떤 작가로 남고 싶나요.
재미있게 소비되었으면 합니다. 관객들이 즐기고, 무언가를 탐구하는 측면에서 제 그림이 잘 소비되면 좋겠어요. 거창하게 얘기하면 재미없으니까. 다양한 사람들도 즐길 수 있고 (내 작품이 소모가 아니라) 소비되면 좋죠. 그게 명과 암을 느끼던, 참여해서 관람하고 해석하든.

이진섭 칼럼니스트•아르떼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