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美 채권 시장이 말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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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석 글로벌마켓부장

과거 30년 동안 30년 만기 국채 금리가 10bp 이상 오르고 동시에 달러가 1.5% 이상 내린 날은 단 네 차례뿐이었다. 그런데 그런 이례적인 상황이 며칠째 이어졌다. 통화와 채권, 주식 약세의 조합은 자본 유출을 뜻한다. 투자은행 에버코어ISI는 “수익률 상승과 통화 약세는 신흥시장(EM)에선 흔하지만 미국에서는 매우 이례적”이라며 “미국 예외주의가 흔들리고 있다”고 분석했다.
30년간 네 번밖에 없던 일
월가는 특히 국채 시장의 변동성에 경악했다. 29조달러 규모의 미국 국채 시장은 세계 금융 시스템의 근간이다. 각국 중앙은행과 주요 금융회사는 모두 미 국채를 보유하고 있으며 단기 국채는 현금처럼 취급된다. 이런 시장이 널뛰는 건 미국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고 있다는 얘기다. 미 연방정부가 더는 돈을 쉽게 빌릴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트럼프 대통령이 9일 상호관세 90일 유예를 발표하면서 그 이유로 “채권 시장에서 약간 불안해하는 모습을 봤다”고 할 정도였다. 미국 예외주의가 의심받는 이유는 여러 가지다. 우선 관세 등 정책 불확실성으로 미국 경제가 냉각되고 있다. 미국의 재정 건전성에 대한 우려도 크다. 2025회계연도 들어 지난 3월까지 6개월간 재정 적자는 작년보다 22% 늘어난 1조3000억달러에 달했다. 국내총생산(GDP)의 9%에 육박하는데, 경기 침체가 닥치면 10%를 돌파할 수 있다. 기술적으로 헤지펀드의 디레버리징도 더해졌다. 시간이 흐르면 이런 걱정은 가라앉을 수 있다. 높아진 수익률로 인해 채권 매수세가 유입될 수도 있다. 스콧 베선트 미 재무장관은 “미국 자산 덤핑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거대한 변화…미국 떠나는 자본?
하지만 거대한 변화를 암시하는 징후라는 시각도 많다. 트럼프 행정부가 세계 무역과 금융질서 개편에 나서면서 1940년대부터 지속돼온 브레턴우즈 체제가 훼손되고 있다는 것이다. 헤지펀드 브리지워터 설립자인 레이 달리오는 “글로벌 통화 시스템이 붕괴할 것을 우려한다”고 했다. 일부에선 ‘마러라고 합의’ 논란이 외국인 투자자를 겁먹게 했다고 지목한다. 스티브 미란 백악관 경제자문위원회(CEA) 위원장은 미국 제조업을 살리려면 달러를 절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각국이 보유한 미 국채에 수수료를 때려 매각을 유도하겠다고 제시한다. 그러면서도 차입 비용 상승을 막으려고 각국에 100년 국채(무이자) 매입을 강제하는 게 마러라고 합의다. 이는 채권 시장에서 채무 불이행을 뜻한다.골드만삭스는 미국 예외주의가 이어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하반기에는 감세와 규제 완화로 인해 미국의 성장이 개선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세계 경제 질서가 트럼프의 탈세계화 속에 다극화하고 있다는 징후는 곳곳에서 감지된다. 지난주 미 채권 시장의 극적 움직임이 그중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