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일훈 칼럼] 한국, 다시 가난해질 각오 돼 있나

미국 50년, 중국시장 30년
한국의 초장기 수출시장
어느 날 갑자기 '리스크'로 돌변
이제 무엇을 파먹고 살아야 하나

기업·산업 고도화해야 하지만
정치·사회는 파괴와 퇴행 거듭
한국, 원래 자리 돌아갈 건가

조일훈 논설실장
넷플릭스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가 많은 시청자의 심금을 울린 힘은 가슴 먹먹한 해피엔딩의 서사였다. 개발경제 시대의 고단함을 온몸으로 부딪히며 살아낸 앞선 세대의 희생과 헌신이 후대의 눈부신 성장과 번영으로 이어진 여정은 누구도 시비를 걸 수 없는 역사적 진실이었다. 우리들 삶이 지금 날까지도 궁상맞은 모습이라면 드라마는 완전한 허구나 공상의 세계에 머무르는 허탈함만 자아냈을 것이다.

드라마 속 해피엔딩은 있어도 현실에선 ‘엔딩’이라는 것이 없다. 개인의 삶이든, 국가적 명운이든 크고 작은 도전과 시련을 피할 수 없다. 거침없던 우리 경제가 완전히 나락으로 떨어진 적이 딱 한 번 있다. 1997년 11월 발발한 외환위기(IMF 사태)다. 노동·금융·공공개혁을 미룬 채 달러당 800원 시대를 흥청망청하느라 나라 곳간이 완전히 바닥난 초유의 사태였다. 위기 직전까지 99.99%의 국민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금리가 연 30%, 원·달러 환율이 2000원까지 치솟은 가운데 기업들의 줄도산으로 엄청난 실업자들이 쏟아져 나왔다. 국내 최대 기업조차 감원 대상을 정하기 위해 이른바 ‘사다리 타기’를 하는 참담한 장면이 이어졌다. 해외 언론들은 “샴페인을 일찍 터뜨린 한국인들이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갈 것 같다”고 조롱했다.

전례 없는 저성장 속에 트럼프발 관세 태풍까지 몰아닥치는 현 상황을 그 시절과 비교하면 어떨까. 중소기업과 자영업자들 사이에선 “외환위기 때보다 어렵다”는 아우성이 넘쳐난다. 엄살이 아닐 것이다. 외환위기는 우리 내부의 고비용 저효율 구조가 자초한 것이지만 외부 환경은 우호적이었다. 미국시장이 견조했고 중국이 새로운 수출시장으로 급부상하고 있었다. 또 세계시장을 주름잡던 일본 기업들은 1985년 플라자합의 이후 가파른 엔고에 시달리고 있었다. 혹독한 구조조정으로 외환위기를 극복한 우리는 이 모든 상황을 새로운 기회로 만들었다.

한국은 지난 50년간 미국을, 30여 년간 중국시장을 파먹고 살았다. 하지만 어느새 주변을 돌아보니 미국은 한국과의 자유무역을 청산하기 시작했고 동맹국 혜택까지 노골적으로 배제하고 있다. 우리 해외법인이 벌어들인 돈은 자국 내 첨단 투자로 모조리 빨아들이고 있다. 원래 한국에 배당돼 일자리와 세금을 만들어야 할 돈이다. 현금성 자산 100조원을 들고 있는 삼성전자의 국내 현금 보유액이 고작 2조원에 머무는 판이다. 중국은 한국에 아예 무역흑자국으로 돌아섰다. 지난 15개월간 무려 100억달러의 흑자를 올린 데 이어 과거 일본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세계 도처에서 우리 기업들의 발목을 잡고 있다. 더욱이 중국은 거대한 창업국가의 위용을 떨치고 있다. 주력 기업 대부분이 창업 1세대다. 과거 한국의 불도저 같은 기업가정신을 떠올리게 하는 그들은 엄청난 내수시장과 중국 정부의 전폭적 지원에 힘입어 족탈불급의 기세를 보이고 있다. 지난 5년 사이 세계 1위 배터리업체인 CATL 매출은 8배, 전기차업체 BYD는 6배, 테무로 유명한 핀둬둬는 13배로 불어났다. 텐센트 샤오미 같은 기업도 미국의 고강도 압박을 뚫고 두 배 안팎의 성장세를 보였다. 반면 세계시장에서 뛰고 있는 한국의 창업세대는 네이버, 셀트리온, 미래에셋 정도다.

솔직히 말해 길이 보이지 않는다. 외환위기 때처럼 구조개혁과 고통 분담을 통해 기업 체질과 산업 경쟁력을 끌어올리는 것 외에는 왕도가 없지만 켜켜이 우리 사회를 에워싼 거대 노조와 기득권 장벽 앞에서 도무지 가능할 것 같지 않다. 학생들까지 가세한 의료계 밥그릇 투쟁에 행정부·병원·대학까지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것이 우리 사회 수준이다. 국회는 고도화된 산업사회를 뒷받침할 준비가 돼 있지 않다. 성장이 싫어하는 갖은 입법을 자행하는 의원들의 면면을 보라. 자기 손으로 자기 눈을 찌르는 파괴와 퇴행은 그칠 줄 모른다. 그래서 나는 다음 대통령에 대해 큰 기대가 없다. 기왕에 폭주와 실패를 거듭해 온 정치가 선거 한번 치른다고 달라질 일이 있겠나. 오히려 약속은 늘어나고 시장 질서는 훼손되며 곳간 살림은 비어나가지 않겠나. 한국은, 한국인은 다시 가난해질지도 모른다. 대한민국은 이제 원래 자리로 돌아가려고 한다. ‘폭싹 속았수다’가 아니라 ‘폭싹 망했수다’는 결코 드라마로 만들어지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