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가 무너뜨린 '미국의 30년 유산'…결국 백기 들었다 [김인엽의 매크로 디코드]

1994년 이래 "강달러가 국익" 입장 유지한 美
달러 강세 통해 국채 매수 유인…증시 뒷받침
정부는 달러 제재로 알카에다·러시아 등 위협

노동자 표심 업은 트럼프 "달러 너무 강해" 반기
실제 달러 폭락하자 다시 "우린 여전히 강달러"
"트럼프의 약달러 소원은 이뤄질 때 무서워"
조지 HW 부시 행정부 때인 2001년 1월 16일. 달러 가치가 급락했습니다. 재무부 장관 지명자 폴 오닐(사진)의 인사청문회를 하루 앞두고 뉴욕타임즈가 쓴 기사가 발단이 됐습니다. 바로 "그(오닐)는 수출업자이기에 달러 약세를 선호할 것으로 예상되지만 이러한 의문에 대해 그 어떤 발언도 하지 않았다"는 문장입니다. 알루미늄 제조업체 알코아의 최고경영자(CEO)인 오닐이 달러 약세를 선호할 것이라는 게 당시 미국 언론의 분석이었습니다.

다음날 청문회에 출석한 오닐은 가족사를 소개하는 관례마저 생략한 채, 마이크를 켜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후보자로 지명된 몇 주 동안, 몇가지 이슈에 대해 많은 언론의 관심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텔레비전 영상을 낭비하지 않기 위해 저는 처음부터 강달러에 찬성한다고 말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왜 저를 약달러 지지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질의 과정에서 알게 될 것입니다."

1994년 로버트 루빈 전 재무장관이 "강력한 달러는 미국의 국익에 부합한다"고 말한 이후 강달러 기조는 20년 넘게 미국 통화정책의 근간으로 자리잡았습니다. 오닐을 비롯해 존 스노우(2003~2006), 헨리 폴슨(2006~2009), 티머시 가이트너(2009~2013) 등 역대 재무장관들은 강달러 정책을 금과옥조처럼 지켜왔습니다.

일반적으로 자국 통화가 강세일 경우 수출에 불리하게 작용합니다. 한국과 일본 등 수출중심국가들은 자국 통화 약세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왜 미국은 강달러를 선호했을까요. 바로 강달러가 미국 금융업계와 백악관에 유리하게 작용했기 때문입니다.

달러가 강세를 유지하면 미국이 쌍둥이 적자(재정+무역적자)를 내도 각국 정부와 투자자들이 계속 미 국채를 매입했고, 높아진 미 국채 가격(금리 하락)은 증시를 떠받쳤습니다. 또 미국 정부 입장에서는 기축통화인 달러의 지위를 이용해 알카에다 등 테러 단체를 제재하고 러시아를 위협할 수 있었습니다.

미국 소비자들도 수입품 가격이 감소하는 만큼 값싸게 공산품을 사들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반대급부로, 금융계와 정치권이 외면하는 사이 미국 제조업은 점차 활기를 잃고 있었습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15일(현지시간) 백악관에서 육군-해군 미식축구 경기에서 승리한 미 해군사관학교 팀에게 트로피를 수여한 뒤 퇴장하고 있다.  /로이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15일(현지시간) 백악관에서 육군-해군 미식축구 경기에서 승리한 미 해군사관학교 팀에게 트로피를 수여한 뒤 퇴장하고 있다. /로이터
이러한 강달러 기조를 흔든 사람이 바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입니다. 미국 백인 노동자들의 지지를 등에 업은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해 "달러 강세는 미국 제조업에 재앙"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취임 이후 미국 제조업을 되살리기 위해 중국과 동맹국들에 관세를 통한 무역전쟁에 나섰습니다.

이러한 트럼프 대통령의 '달러 흔들기' 때문일까요. 지난주 글로벌 투자자들이 달러를 매도하며 달러 가치가 폭락하는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6개 통화 대비 달러 가치를 나타내는 달러인덱스가 1년9개월만에 100 밑으로 떨어졌고, 유로·엔화 가치는 급등했습니다. 10년물 국채 금리는 이틀만에 0.6%포인트 이상 오르며 연 4.5%를 나타냈습니다.

스콧 베선트 미 재무장관은 지난 14일 이러한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블룸버그통신과 인터뷰를 했습니다. 관세 정책이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다소 주목받지 못했지만, 정말 중요한 언급이 숨어있었습니다. 바로 "우리는 여전히 강달러 정책을 가진 글로벌 기축통화"라는 문장이었습니다. 사실상 달러 약세 정책을 철회한다는 뜻으로 시장은 받아들였고, 다음날 달러 인덱스도 100 위로 반등하며 안정세를 보였습니다. 강달러 기조를 다시 천명하며 시장의 불안을 잠재운 것입니다.
6개 주요국 통화 대비 달러 가치를 나타내는 달러 인덱스 추이. 지난주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관세정책에 따른 혼란으로 급격히 하락한 뒤 14일(현지시간) 스콧 베선트 미 재무장관 인터뷰를 계기로 안정되는 흐름이다. /CNBC
트럼프 대통령의 '달러 오락가락'은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1기 행정부 당시인 2017년 "달러화가 너무 강해지고 있다고 생각한다"라며 달러 약세에 대한 의지를 드러냈습니다. 스티브 므누신 재무장관은 이듬해 다보스포럼(WEF·세계경제포럼)에서 "약달러는 무역과 기회 측면에서 미국에 좋다"고 했습니다. 기존 재무장관들이 유지해오던 강달러 기조를 완전히 뒤집은 '폭탄 발언'이 나온 것입니다. 이후 달러 가치가 급락하자 트럼프 대통령이 "궁극적으로 내가 원하는 것은 강달러"라며 진화에 나섰습니다.

외신들은 이러한 트럼프 대통령의 달러화 혼선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블룸버그통신은 14일 사설에서 "약달러 소원은 이뤄질 때 무섭다"고 지적했습니다. 블룸버그는 "국내총생산(GDP)의 7%에 해당하는 재정적자는 여전히 주요 위기 때와 비슷하다"라며 "최근 달러에서 볼 수 있는큰 통화 변동은 지속될 경우 외국 채권 보유자에게 실질적인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분석했습니다. 외국인들이 약달러 정책에 따라 달러와 미국채를 팔고 떠날 경우 다시 쌍둥이 적자라는미국 경제의 펀더멘털(기초 체력) 문제가 떠오를 수 있다고 경고한 셈입니다.

지금으로서는 '달러 약세=제조업 부흥'이라는 간단한 공식은 트럼프 대통령의 뜻대로 이뤄지기는 쉽지 않아 보입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최근의 달러 혼란에도 불구하고 약달러를 계속 주장할지 두고봐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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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엽 기자 insid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