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인 올해 역대급 매도 폭탄
국민연금 환헤지 효과 안 통해
'반도체 달러'로 원화 매수세 실종
원화 가치를 끌어올리는 강력한 힘이었던 수출 호황과 증시 랠리가 지금까지와 반대로 원화 가치를 떨어뜨리는 요인이 되고 있다. 코스피지수가 오를 수록 외국인 투자자들이 포트폴리오 비중 조정(리밸런싱)과 환헤지를 위해 원화를 매도하기 있기 때문이다. 반도체 수출로 벌어들인 달러도 해외에 재투자되면서 환율을 방어하는 데 기여하지 못하고 있다. 일각에선 반도체가 원유를 대신해 미국 달러의 유동성을 공급하는 역할을 하면서 ‘페트로달러’의 시대가 지고 ‘D램 달러’의 시대가 왔다는 분석까지 나온다.
◇국민연금 환헤지 반감시키는 외국인
7일 한국은행 경제통계시스템에 따르면 올해 들어 지난 5일까지 원·달러 평균 환율은 달러당 1477.06원으로 집계됐다. 역대 최고치인 지난해의 1420.97원을 50원 이상 웃돌았다. 이달 들어서도 원·달러 환율은 일주일 만에 3.48% 치솟았다. 달러 대비 3.54% 오른 러시아 루블화에 이어 두 번째로 큰 인상폭이다.
원화 가치가 속절없이 떨어지는 건 외국인 투자자가 국내 주식을 역대급으로 팔아치우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5일 코스피지수는 8160.59로 연초보다 94% 급등했다. 특히 반도체 투톱인 삼성전자와 하이닉스의 주가가 이례적으로 빠른 속도로 올랐다. 이에 글로벌 자산운용사들이 운용하는 펀드 내 한국 비중, 특히 반도체주 비중이 일시적으로 급증했다. 글로벌 펀드들은 통상 포트폴리오 내 단일 종목 비중이 10%를 넘어가거나 5% 이상인 종목의 합산 비중이 40%를 넘어가면 리밸런싱에 나서는 것으로 알려져있다.
삼성전자와 하이닉스의 비중이 크게 높아지자 이 종목들에서 차익을 실현한 외국인 투자자들이 국내 다른 종목에 투자하지 않고 달러로 환전해 시장을 떠나면서 원화 매도세가 급증하고 있다. 세계국채지수(WGBI) 편입으로 4월부터 최근까지 외국인 자금이 187억달러 (약 29조원) 가량 유입됐고, 국내시장복귀계좌(RIA) 도입 이후 지난달 19일까지 1조9443억원어치의 ‘서학개미’ 자금이 국내로 돌아왔지만 역부족이었다는 평가다.
외국인 투자가의 환헤지도 원화 매도세를 부추기는 요인이다. 한국 반도체주는 유망하게 보지만 원화 가치 하락을 우려하는 외국인 투자자들이 주식은 사지만 원화는 팔고 있다는 뜻이다. 국민연금이 환율 방어를 위해 달러를 파는 환헤지를 하고 있지만, 정반대 방향의 외국인 헤지 물량이 워낙 커 효과를 반감시키고 있다는 분석이다. 한·미 금리 역전은 외국인의 환헤지를 더 매력적으로 만든다. 금리 차에서 발생하는 헤지 프리미엄까지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원화 매수세 실종시킨 ‘반도체 달러’
국내 반도체 기업들이 ‘인공지능(AI) 특수’로 벌어들인 달러를 미국에 재투자하는 현상도 원화 매수세를 실종시킨 원인으로 꼽힌다. 미국외교협회(CFR)의 브레드 세처 선임연구원은 이런 현상에 ‘D램 달러’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했다. 과거 중동 산유국이 달러로 원유를 거래한 후 벌어들인 달러를 미국에 재투자해 ‘달러 헤게모니’를 유지하던 페트로 달러 시절 원유의 역할을 반도체 등 동아시아 국가의 정보기술(IT) 제품이 대신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는 반대로 반도체 수출이 급증해 경상수지 흑자가 아무리 늘어나도 국내 외환시장에서 원화 매수로 연결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외환당국의 거듭된 구두 개입도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하고 있다. ‘환율이 오를 것’이라는 믿음 때문에 시장 참가자들이 미리 달러를 사들이고, 그 결과 실제로 환율이 오르는 ‘자기실현적 기대’가 강해졌기 때문이란 분석이다.
이날도 구윤철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은 ‘긴급 시장상황점검회의’를 열어 한국은행과 금융감독원의 검사를 통해 투기적 움직임 또는 시장교란 의심 행위를 점검하기로 했다. 수출입 기업들이 환율 상승에 편승해 수입대금 지급을 앞당기거나 수출대금 수령을 과도하게 지연시키는 불법거래를 하는지도 조사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