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의 겨울은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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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 여러분, 우리 비행기는 빈국제공항에 도착했습니다.” 착륙을 알리는 기내 방송이 나오기 무섭게 짐을 챙기는 승객들의 표정이 가볍다. 약 3년 만의 출국, 마스크 없는 여행. 장시간 비행에도 피곤한 줄 모르고 뜬눈으로 13시간을 지새운 건 기자만이 아닐 거란 확신이 들었다.
겨울 여행의 묘미, 크리스마스 마켓
지난 3년간 코로나19로 잠시 숨을 고른 오스트리아가 연말연시 축제로 원래의 아름다움을 되찾았다. 그중 단연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으니 크리스마스 마켓. 유럽 3대 크리스마스 마켓 중 하나로 꼽히는 오스트리아 빈 크리스마스 마켓은 700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1296년 알브레히트 황제가 12월에도 서민들이 생필품을 거래할 수 있도록 만든 데서 유래해 오늘날까지 오스트리아를 대표하는 축제로 자리매김했다.매년 11월 중순이면 시청 앞에 펼쳐진 150여 개의 노점에서 각종 크리스마스 장식, 전통 음료·디저트, 수공예품 따위를 판매하고, 매주 주말 캐럴을 노래하는 합창단이 감미로운 분위기를 더한다. 마켓 곳곳에서는 김이 폴폴 나는 머그잔을 들고 이야기를 나누는 시민들의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잔에는 글뤼바인(Glühwein)과 푼쉬(Punsch) 등 따뜻한 겨울 음료가 담겨 있다. 약간의 알코올을 함유해 추운 날씨 몸을 데우기에 그만이다.
음료를 구입하면 전용 머그잔에 따라주는데, 보증금이 포함돼 있어 그냥 가져가면 된다. 구매한 곳에 반납하면 보증금을 돌려받을 수 있지만 상점마다 다른 디자인의 머그잔을 모으는 재미가 쏠쏠해 대부분은 한 손에 잔을 덜렁덜렁 든 채 마켓을 누비곤 한다.
시청에서 도보로 약 20분이면 닿는 구시가지 광장에서도 야외 마켓이 열린다. 야간조명이 들어오기까지는 시간이 조금 남아 슈테판 대성당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12세기 건축돼 도시의 흥망성쇠를 빠짐없이 지켜본 최고(最古)의 성당에 ‘빈의 혼(魂)’이란 애칭이 붙은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리라. 성당 안에 들어서면 39m에 이르는 천장과 벽, 스테인드글라스를 섬세하게 장식한 고딕 양식이 가장 먼저 눈을 사로잡고, 때마침 거행된 미사와 거룩한 파이프오르간 소리에 카메라를 잠시 내려놓게 된다.
빈 시내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슈테판 대성당 전망대에 오르는 방법은 68m 높이의 북탑과 137m 높이의 남탑 두 가지다. 별도의 입장료가 있는 데다, 북탑은 엘리베이터가 설치돼 있고 남탑은 343개의 계단으로 이뤄져 있어 둘 중 어디를 가야 할지 고민하는 이들이 많다. 두 탑을 모두 올라본 입장에서는 북탑을 단연 추천한다. 엘리베이터 덕에 여행자에게 가장 중요한 체력을 비축할 수 있음은 물론, 실질적인 전망대 높이는 약 17m밖에 차이 나지 않아 힘겹게 계단을 올랐다는 억울함도 덜 수 있다.
더군다나 남탑 전망대는 실내에, 북탑 전망대는 야외에 있다. 엘리베이터로 30여 초, 북탑 전망대에 오르니 23만여 개의 금색과 청색 타일로 이뤄진 화려한 지붕이 양탄자처럼 펼쳐진다. 겨울 기준 일몰 무렵인 오후 4시에 탑에 올라 전망대 폐장 시간인 오후 5시 30분까지 머무르면 시시각각 변하는 빈의 얼굴을 마주할 수 있다. 크리스마스 마켓 투어의 종착지는 오스트리아의 대표적인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의 ‘키스’가 전시된 벨베데레 궁전. 낮엔 전시를 관람하는 이들로 사뭇 진지한 분위기가 주를 이루지만, 밤이 되면 야시장을 즐기기 위한 인파로 북적인다. 상궁 뒤편 정원을 크게 돌아 걸었다. 거울처럼 깨끗한 호수에 반짝이는 상궁과 별 모양 조명이 그대로 투영되고, 오스트리아의 밤은 깊어만 간다.
빈, 유럽 문화예술의 중심
영국 이코노미스트 인텔리전스 유닛(EIU)에 따르면 2022년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 1위로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이 선정됐다. 코로나19 완화로 박물관·문화재 등이 재개장했고, 문화·환경 등 지표에서 높은 점수를 받았다고 EIU는 분석했다. 빈의 정체성은 문화예술로 통한다 해도 과언이 아닌 셈이다. 빈의 역사를 이야기하며 약 600년간 유럽의 중심에 있었던 합스부르크 왕가를 빼놓을 수 없다. 열렬한 수집가였던 이들은 스페인·벨기에 등 유럽 각지에서 예술품을 모았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광대한 수집품을 집대성한 곳이 빈미술사박물관이다. 2022~2023년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합스부르크 600년, 매혹의 걸작들> 전시의 발원이기도 하다. 이곳에선 궁정화가로 활동한 페테르 파울 루벤스(Peter Paul Rubens), 디에고 벨라스케스(Diego Velázquez)의 작품을 놓쳐서는 안 된다.높이 4.58m에 달하는 루벤스의 ‘성모 승천’(1606)은 사진으로 전달되지 않는 엄청난 위압감을 선사한다. 벨라스케스의 그림 속 마르가리타 마리아 테레사의 성장 과정을 감상하는 재미도 있다. ‘푸른 드레스를 입은 마르가리타 공주’(1659)는 내한 중인 ‘흰옷의 어린 공주 마르가리타 테레사’(1656) 속 테레사 공주의 3년 후 모습이다. 세계 3대 오페라 하우스 중 하나인 빈국립오페라극장은 오스트리아 구시가지를 둘러싸고 있는 링 스트라세(Ringstrasse·순환도로)가 만들어질 때 가장 먼저 지어진 건물이다. 1869년 모차르트의 오페라 <돈 조반니>가 초연된 이래 매년 300여 회의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공연이 치러진다고 하니, 오스트리아 사람들의 남다른 오페라 사랑을 짐작할 수 있다
오페라극장의 야경을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서는 대각선에 있는 알베르티나 미술관에 올라야 한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한 층만 오르면 영화 <비포 선셋> 속 두 주인공이 사랑을 속삭이던 공간이 그대로 펼쳐진다.
도시의 자체가 역사가 되는 잘츠부르크
오스트리아는 도시마다 특색이 뚜렷해 한 곳에만 머물기에는 아깝다. 오스트리아 열차 OBB를 타고 3시간가량 달리면 예술의 도시 잘츠부르크에 닿는다. 역사가 깃든 건물과 천혜의 자연경관을 마주하고 나니 구도심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라는 사실이 비로소 납득이 간다. 모차르트의, 모차르트에 의한, 모차르트를 위한 도시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게 도시 곳곳 천재 음악가의 흔적이 가득하다. 신시가지에서 구시가지로 가는 길목에서 모차르트가 수도 빈으로 떠나기 전 7년간 머무른 모차르트 집을 만날 수 있다.2층 건물에는 그가 생전 사용하던 포르테피아노·악보·초상화 등이 전시돼 있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거리이자 잘츠부르크 중심가인 게트라이데 거리에는 모차르트가 17세까지 살았던 모차르트 생가, 동상이 세워진 모차르트 광장, 그의 단골 식당인 슈테른브로이 등 명소가 몰려 있어 하루 날 잡고 둘러보기 안성맞춤이다.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의 무대가 된 곳도 바로 잘츠부르크다. 주인공 마리아와 아이들이 ‘도레미 송’을 부른 미라벨 정원은 갖가지 꽃과 화단, 분수로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덕에 1년 내내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잘츠부르크역에서 도보로 10분이면 갈 수 있어 접근성 역시 좋다.
잘츠부르크의 야경을 감상하기 위해 많은 이들이 호엔잘츠부르크성에 오른다. 하지만 성이 어우러진 전경을 보려면 묀히스베르크 현대미술관에 있는 전망대가 제격이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30초 정도 오르면 왕복 4.1유로가 아깝지 않은 환상적인 구시가지 야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왼쪽으로는 잘차흐강이 잔잔히 흐르고, 우뚝 선 건물과 거리 곳곳에서 무드 등처럼 조명이 피어오른다. 미술관은 오후 6시면 닫지만, 전망대는 오후 9시까지 열려 있어 보다 오랜 시간 잘츠부르크 시내의 비경을 눈에 담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