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와 오늘은 다르지 않지만 작년과 올해는 아침부터 달라서 기도를 더 오래 해야 했다” 정재율 시인의 '라스 우바스'의 한 구절이다. 오래전 읽은 시 구절이 불현듯 만경강 앞에서 생각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만경강의 시작을 기억해

작년과 올해가 다르지 않다면 그건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작은 샘에서 시작된 만경강이 다른 물줄기와 만나지 않는다면? 갑자기 크고 좁아지는 변화를 두려워한다면, 강은 철새를 품지 못하고, 바다라는 새 이름도 얻지 못할 것이다. 끊임없이 ‘흐름’은 강의 기도일 것이다. 인간의 기도는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만경강이 살얼음을 깨며 나아가는 소리를 귀 기울여 들었다.
신천습지에서 겨울을 나는 철새들. 만경강의 허파로 불리는 신천습지는 회포대교에서 하리교까지 2.4km에 걸쳐 형성됐다./사진=이효태
신천습지에서 겨울을 나는 철새들. 만경강의 허파로 불리는 신천습지는 회포대교에서 하리교까지 2.4km에 걸쳐 형성됐다./사진=이효태
만경강의 본래 이름은 ‘사수강(泗水江)’이다. 크게 4개의 천(전주천·삼례천·고산천·익산천)이 만나서 이루어지는 강을 뜻한다. 일제강점기 행정구역 개편으로 오늘날의 이름이 되었으니 만경의 경(頃)은 ‘백 이랑’, 즉 만경강은 백만 이랑을 지닌 풍요로운 강을 의미한다.

백만 이랑에서 빼앗은 쌀은 도대체 얼마의 양일까? 두 글자의 이름에서 가늠조차 되지 않는 일제의 야욕이 드러난다. 과거를 바꿀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우리 후손들은 지난 역사를 잘 기억해야 한다. 만경강의 원래 이름이 무엇인지 잘 기억하고, 강이 강으로서 흐를 수 있게 인간은 그의 할 일이 있겠지. 그래서 자분자분 만경강의 이야기를 들으러 걸어보기로 했다. 강의 기도가 시작되는 첫 번째 공간, 발원샘(밤샘)이다.
동상면 사봉리에 위치한 만경강 발원지, 밤샘./사진=이효태
동상면 사봉리에 위치한 만경강 발원지, 밤샘./사진=이효태
스마트폰에서 지도 앱을 확대하고 확대하면 그전에는 보이지 않던 실핏줄 같은 강줄기가 보인다. 아니, 강줄기가 되기 전의 샘물이다. 이곳을 찾아가려면 내비게이션에 ‘밤샘교’를 입력하면 된다. 동상면 사봉리에 위치한 밤샘교에서 밤샘까지는 1.5km, 만경강 발원지로 잘 알려진 터라 중간중간 이정표도 잘 세워져 찾기 어렵지 않다.
만경강 발원샘
만경강 발원샘
편백나무, 때죽나무, 졸참나무가 우거진 숲 안쪽에 반가운 밤샘이 보인다. 길이 80.86km, 유역면적 1504.35㎢로 호남평야를 적시는, 완주-전주-익산-김제-군산을 거쳐 서해가 되는 만경강이 이곳에서 시작된다니. 수북이 쌓인 낙엽을 적시며 나아가는 물줄기는 첫걸음을 뗀 아기처럼 경이롭기만 하다. 무수한 삶을 일구고, 무수한 추억의 배경이 되는 만경강은 밤샘을 발원지로 동상·대아 저수지와 합류해 고산면으로 큰 줄기를 이루며 뻗어 나간다.
만경강 상류의 세심정을 따라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다./사진=이효태
만경강 상류의 세심정을 따라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다./사진=이효태

만경강에 기댄 뭇 생명

고산면에서 삼례읍으로 향하는 만경강은 강의 생명력을 뽐내듯 신천습지에서 새로운 세계를 만든다. 용진읍 회포대교에서 삼례읍 하리교까지 2.4km에 걸쳐 형성된 신천습지는 만경강의 허파다. 습지 곳곳에는 만경강의 유속에 따라 자연스럽게 형성된 모래톱이 작은 섬처럼 자리한다.
사진=이효태
사진=이효태
모래나 자갈이 모여 형성된 하천 지형을 모래톱이라고 하며, 강 한가운데 만들어진 퇴적 지형은 하중도로 부른다. 신천습지에 이르러 만경강의 폭은 크게 넓어지고 완만한 경사에 유속이 느려지며 습지 곳곳에 모래톱과 하중도가 형성된다. 덕분에 다양한 식물군락이 분포할 수 있고, 멸종위기종에 이르는 철새들이 머물며 활발히 먹이 활동을 하는 순환을 이루는 것이다.
소양천과 합류하며 유속이 느려지는 신천습지에는 모래톱과 하중도가 많아 다양한 수생식물이 분포하고, 철새와 텃새들의 소중한 보금자리가 되고 있다./사진=이효태
소양천과 합류하며 유속이 느려지는 신천습지에는 모래톱과 하중도가 많아 다양한 수생식물이 분포하고, 철새와 텃새들의 소중한 보금자리가 되고 있다./사진=이효태
그동안 흔히 보았던 새라면 청둥오리, 백로뿐이었는데 신천습지에서 처음으로 큰기러기를 보았다. 멸종위기조류 2급인 큰기러기는 부리가 검정색으로 끝부분에 황색 띠를 두르고 있다. 몸은 짙은 갈색, 다리는 주황색이다. 큰기러기와 크기가 비슷해 닮은 듯 다른 청둥오리는 겨울 철새에서 이제 텃새가 되었다. 수컷은 목 부분에 짙은 녹색을 두르고 있으니 큰기러기와 잘 구분해보자.
사진=이효태
사진=이효태
어디 이뿐인가. 신천습지에는 물닭, 홍머리오리, 흰목물떼새, 잿빛개구리매 등 이름도 낯선,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없는 귀한 새들이 관찰된다. 해가 질 무렵에는 하늘을 수놓는 새들의 무리가 바쁘다. 습지와 들판에서 밤을 보내는 새들끼리 자리 이동이 이뤄지는 것이라고. ‘너희도 퇴근을 하는 거니?’ 한편 만경강은 국내 최대 황새 월동서식지로 운이 좋다면 멸종위기 야생생물 1급이자 천연기념물인 황새도 두 눈에 담게 될지 모른다.
소양천과 합류하며 유속이 느려지는 신천습지에는 모래톱과 하중도가 많아 다양한 수생식물이 분포하고, 철새와 텃새들의 소중한 보금자리가 되고 있다./사진=이효태
소양천과 합류하며 유속이 느려지는 신천습지에는 모래톱과 하중도가 많아 다양한 수생식물이 분포하고, 철새와 텃새들의 소중한 보금자리가 되고 있다./사진=이효태
만경강은 호남평야의 젖줄로 서두에 언급한 것처럼 일제강점기 대표적인 수탈지로 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1914년에 삼례읍에는 만경강 철교가 세워지고, 거대한 양곡창고가 속속 들어섰다. 호남평야에서 수확한 곡물을 안전하고 빠르게 가져가기 위함이었다.

퍼져나가는 문화의 흐름

1920년대 건축된 7동의 양곡창고는 지난 2013년 삼례문화예술촌으로 개관했다. 만경강처럼 삼례문화예술촌도 끊임없이 흐르며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니 완주를 여행한다면 꼭 들러볼 곳이기도 하다. 현재 제1전시관에서 <Vincent van Gogh>전(~4.30), 주말에는 '딸기찹쌀떡'만들기 체험도 열리니 참고하자.
전북 완주, 삼례문화예술촌
전북 완주, 삼례문화예술촌
바야흐로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문화가 되고 있는 시대다. 일찍이 완주의 오성한옥마을이 그러했다. 자연을 갤러리로 들여온 과감함과 그 어떤 호텔보다 세련되고 흥미로운 한옥스테이의 묘미를 전하고, 서까래 아래에서 책장을 넘기는 평화를 맛보게 한다.
전북 완주, 오성한옥마을 아원고택
전북 완주, 오성한옥마을 아원고택
아원고택은 경남 진주의 250년 된 한옥을 오성한옥마을로 옮겨 이축한 데 이어 미디어아트 전시공간과 ‘서당’이라는 이름의 또 다른 한옥을 선보였다. 전남 함평에서 조선시대 말기까지 서당으로 쓰인 고택을 옮겨온 것인데 대청의 들어열개(문)를 올리자 마당의 종남산이 눈앞에 산수를 그려놓은 듯 가깝다.
전북 완주,  'BTS소나무'로 불리는 오성제의 명물 소나무
전북 완주, 'BTS소나무'로 불리는 오성제의 명물 소나무

여정의 즐거움

완주로컬푸드
사진=이효태
사진=이효태
완주를 여행할 때는 큰 장바구니를 챙기자. 완주 곳곳의 로컬 푸드 매장에서 지역민이 직접 생산한 농산물을 직거래 방식으로 구매할 수 있기 때문. 용진읍에 자리한 용진농협로컬푸드는 신선한 제철 식재료로 뷔페 레스토랑까지 운영하니 완주를 여행한다면 꼭 들러 봐야 할 곳이기도 하다.
전북 완주군 용진읍 완주로 187

본앤하이리
사진=이효태
사진=이효태
농림축산식품부가 선정한 ‘사회적 농장’이자 농촌융복합 산업 인증을 받은 제품을 판매하는 믿음직스러운 카페 다. 붉은 벽돌의 2층 건물로, 본앤하이리에서 직접 생산한 제품들로 만든 베이커리와 음료를 맛볼 수 있다. 카페 왼쪽으로는 1650㎡의 하우스에서 레몬, 한라봉이 자라고 있다. 구경은 덤, 마음 저 끝까지 싱그러움이 물든다.
전북 완주군 용진읍 하이1길 60

여정을 돕는 10pick

오성한옥마을
전북 완주, 아원고택 미디어아트 갤러리
전북 완주, 아원고택 미디어아트 갤러리
노출 콘크리트 건물은 아원고택이 서당(한옥스테이)과 함께 새롭게 개관한 갤러리. 이이남 작가의 디지털 작품이 네모난 기둥에 투영되고 있다. 오성한옥마을의 뉴페이스로 최근 소양고택에서도 포항에서 이축한 여일루의 문을 열었다.
전북 완주군 소양면 송광수만로 516-7

먄경강 발원샘
길이 80.86km, 유역면적 1504.35㎢로 호남평야를 적시는 만경강은 완주에서 전주, 익산, 김제, 군산을 거쳐 서해가 된다. 그 시작을 이루는 만경강 발원샘으로 의미 있는 여정을 떠나보자.
전북 완주군 동상면 사봉리 밤샘교에서 1.5km

신천습지
신천습지는 만경강의 허파로 불린다. 운이 좋은 날에는 황새도 볼 수 있다고! 유속의 변화가 느려지며 생겨난 모래톱이 많아 철새와 텃새의 소중한 보금자리가 되고 있다.
전북 완주군 삼례읍 하리 15

그림책미술관
사진=이효태
사진=이효태
삼례읍에 자리한 그림책미술관. 빅토리아시대 그림책 3대 거장의 상설전시와 헬렌헤이우드의 ‘숲속연못展’ 기획전시가 열리고 있다.
전북 완주군 삼례읍 삼례역로 48-1

오성 한글다리
사진=이효태
사진=이효태
오성제의 또 하나 포토 스폿. 자음과 모음으로 이뤄진 오성 한글다리다. 하나하나 조합해보면 오성한옥마을, 완주사랑, 완주군에 바란다를 읽어볼 수 있다. 다리 앞에는 오성한옥마을체험관이 자리한다.
전북 완주군 소양면 오도길 73

오성한옥마을체험관
사진=이효태
사진=이효태
창밖의 윤슬을 바라보며 차 한 잔을 즐길 수도 있고, 여러 전통문화체험프로그램도 열린다. 오성제(저수지)와 바로 연결되어 수변길 따라 소양문화생태숲을 산책하기에도 그만이다.
전북 완주군 소양면 오도길 73

세심정
사진=이효태
사진=이효태
대숲이 우거진 만경강 상류. 조선시대 문인 만죽 서익 선생을 기념하는 세심정과 유허비를 찾아볼 수 있다. 세심정 너머로는 고산향교도 자리하니 함께 들러보자.
전북 완주군 고산면 고산로 147-32 인근

삼례문화예술촌
만경강에 노을이 지기 전 삼례문화예술촌에 들러보자. 일제강점기에 조성된 거대한 양곡창고가 복합문화공간으로 재탄생되었다.
전북 완주군 삼례읍 삼례역로 81-13

비비정예술열차
백 년의 역사를 지닌 구 만경강 철교 위에 붉은색 열차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만경강의 일몰을 감상하는 최적의 장소이자, 레스토랑과 카페를 운영하는 비비정예술열차다.
전북 완주군 삼례읍 비비정길 73-21

BTS 소나무
오성제를 가로지르는 제방에는 멋들어진 소나무 한 그루가 뿌리를 내리고 있다. 일명 ‘BTS 소나무’로 세계적인 보이그룹 방탄소년단(BTS)이 이곳에서 2019년 화보를 촬영하며 널리 알려졌다.
전북 완주군 소양면 대흥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