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따라, 역사 따라 인천을 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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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보면 재미 두 배’는 여행에도 해당되는 이야기다. 인천 곳곳에 한국문화원연합회가 끌러놓은 이야기 보따리에 주목해보자. 역사 유적도 다이내믹한 곳으로 느껴진다. 역사 공부는 덤!
종교 유적지에 깃든 역사 속 장면들
전등사강화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사찰 중 한 곳. 삼국시대인 381년, 진나라에서 온 아도화상이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사찰. 1500여 년의 오랜 역사를 간직한 곳이지만 아쉽게도 조선시대에 큰 불이 나면서 전소되었다. 광해군 때인 1621년 지금의 모습으로 세워졌다.
절 규모는 크지 않지만 단정한 모양새와 정교한 조각 장식으로 꾸며져 조선 중기 건축물 중에서도 손에 꼽힌다. 보물로 지정된 대웅전,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 약사전 등 다양한 문화재를 만나볼 수 있다. 그중에서도 약사전에 걸린 전등사약사전후불탱은 18세기 후반의 색 배합과 뛰어난 필력을 갖춰 불화 연구의 귀중한 자료로 꼽힌다. 대한성공회 강화성당
1900년에 지어진 강화성당은 조선의 토착 종교를 반영해 기독교를 전파하고자 한 영국 성공회 선교사들의 토착화 노력을 보여준다. 불교 가람, 유교 사당과 닮아 있다. 강화성당은 사찰의 대웅전처럼 성당의 형태를 한옥 양식에 배 형상으로 건축함으로써 ‘깨달음의 배’가 향하는 반야용선의 사상을 ‘구원의 방주’라는 기독교 사상에 접목했다. 곳곳에서 연꽃 문양을 볼 수 있고, 단청까지 칠해져 있다. 또 불교 사찰의 범종각에 해당하는 종도 찾아볼 수 있는데, 종에는 불교 문양이 아니라 십자가가 새겨져 있다. 본당 앞에는 보리수 두 그루를 심었다.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은 붓다를 상징하는 것이다. 선비를 의미하는 회화나무를 심는 등 유교적인 요소도 반영했다. 토착 양식으로 성당을 짓는 대한성공회의 전통은 대한제국 시기부터 일제강점기까지 이어졌다. 인근 길상면의 온수리성당 역시 1906년 건축된 한옥성당으로 유명하다. 성공회 강화성당과 거리가 가까워 함께 둘러보기 좋다. 성공회는 강화성당을 시작으로 강화도 내에 24곳의 성당을 지었는데, 현재는 12곳이 남아 있다.
‘최초’를 따라가는 역사 여행
대불호텔1888년 일본인 해운업자인 호리 히사타로가 운영한 한국 최초의 서양식 호텔이다. 인천과 서울은 우마차로 12시간이 걸리는 거리로, 승선을 위해 먼 지역에서 찾아오는 이들로 호텔이 붐볐다. 1885년 한국에 온 미국 선교사인 아펜젤러나 언더우드, 1885년 5월 조선에 부임한 영국 영사 칼스 등이 이곳에서 묵었다. 이후 1899년 경인선이 개통되고 서울~인천이 한 시간 거리로 좁혀지며 인천의 숙박업은 쇠퇴의 길을 걸었다. 호텔은 1907년까지 영업을 이어가다 폐업했고, 이후 중국인이 인수해 중국음식점인 중화루로 운영되기도 했다. 한동안 빈터였던 곳을 2018년 고증을 거쳐 복원, 전시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수도국산달동네박물관
수도국산달동네박물관은 1960~1970년대 수도국산에 모여 살던 달동네 사람들의 기억을 간직하기 위해 만들어진 공간이다. 박물관에 들어서면 60년 전으로 시간여행을 떠난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 달동네 주민들이 실제로 사용했던 손때 묻은 물건들이 소장되어 있기 때문. 결혼할 때 혼수로 마련해온 버선과 식탁보, 알싸한 등유 냄새를 풍기며 냄비를 까맣게 그을리던 석유풍로에서 가난한 이들의 삶을 엿볼 수 있다.
전시실에는 수도국산달동네의 골목길을 그대로 재현해놓았다. 솜틀집, 뻥튀기 아저씨, 귀신이라도 나올 것 같은 재래식 화장실, 동네 사진관과 슈퍼마켓 등은 어른들에겐 어린 시절의 추억을, 어린이와 청소년에게는 재미있는 옛 경험을 제공한다. 전시실 곳곳에서는 동네 주민들이 당시의 기억을 풀어놓는 인터뷰 영상을 볼 수 있어서 생생함을 더한다. 어린이들은 달동네놀이체험관에서 달동네 사람들의 생활과 놀이문화를 직접 체험해볼 수도 있다.
맛에도 이야기가 있다
밴댕이회무침밴댕이는 크기는 작지만 맛만큼은 민어와 농어 못지않게 뛰어나 미식가들의 사랑을 받아왔 다. 인천에서는 밴댕이를 구이, 무침, 조림, 찜, 탕 등 다양한 요리의 재료로 사용해왔다. 특히 뼈째 잘게 썬 밴댕이회를 매콤한 양념에 무친 밴댕이회무침은 오래전부터 인천 사람들의 사 랑을 받아온 인천광역시의 향토음식이다. 인천에는 ‘밴댕이의 고장’이라고 불러도 손색없을 정도로 밴댕이골목이 많다. 그중에서도 북 성동의 밴댕이골목은 오랜 역사를 자랑한다. 이곳은 인천항의 부두노동자들과 인근 공장지 역의 노동자들이 서해에서 무진장 잡히는 값싼 밴댕이를 뼈째 썬 막회를 안주 삼아 목을 축이 던 곳이었다. 북성동 밴댕이골목은 그 오랜 역사만큼 오래된 밴댕이집이 많다.
그중에서도 ‘제1호 수원집 밴댕이회’라는 빨간 바탕에 흰 글씨의 간판이 달린 작은 식당이 이 골목의 가장 오래된 가게다. 이곳은 6·25전쟁이 끝날 무렵 ‘인민군집’이라 불리던 고(故) 이기 택 씨의 가게를 당시 종업원으로 일하던 신태희 씨가 물려받은 뒤 이름을 바꿔 운영하고 있다.
이 밖에도 연안부두로 일대는 ‘연안부두 밴댕이회무침거리’로 지정되어 있다. 특히 연안부두 옆 3층짜리 해양센터에는 1980년대부터 영업을 시작한 밴댕이집들이 모여 있다. 이곳은 서해 안을 바라보며 맛있는 밴댕이회를 저렴한 가격에 푸짐하게 즐길 수 있어 부두를 찾는 관광객 들로 붐빈다. 짜장면
짜장면은 화교들과 함께 한국에 상륙한 음식이다. 1882년 임오군란 이후 인천항이 개항하면서 중국 산둥성 화교들이 건너와 정착하기 시작했고, 지금의 북성동과 선린동 일대에 중국인 거리가 형성되었다. 그중에서도 부두 근로자인 ‘큐리’(하역 인부)들이 인천항 부둣가에서 간단히 끼니를 해결하기 위해 춘장에 국수를 비벼 먹던 음식이 바로 짜장면의 원조다.
싸게, 많이 팔기 위해 춘장과 조미료를 넣고 채소를 큼직하게 썰어 물컹하게 조리했다. 주재료로 저렴한 감자와 양파, 양배추를 많이 넣은 이 음식은 중국에는 없는 한국 식 짜장면이었다. 이후 청조계지를 중심으로 짜장면을 만들어 파는 중식 음식점이 많이 생겼는데, 흔히 ‘원조 짜장면집’으로 알려진 공화춘은 1905년에 문을 열었다. 젓국갈비
이름도 생소한 이 메뉴는 강화의 향토음식이다. 강화군의 대표 특산물 중 하나인 새우젓을 넣은 국물에 돼지갈비를 넣어 푹 끓여내면 완성. 보기에는 맑은 국물이지만, 소고기뭇국이나 고기국 밥과 비슷한 맛이 난다. 오래 끓이면 끓일수록 진국이 되는 것이 젓국갈비의 매력이다.
젓국갈비의 역사는 고려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몽골의 침략을 받아 수도를 강화로 옮기게 되면 서 신하들의 고민이 생겼다. 먹거리가 마땅치 않은 섬에서 임금의 수라를 차리는 것. 신하들은 강 화도에서 나는 식재료 중 가장 귀하다고 여긴 것 을 모아 요리했는데, 이때 탄생한 것이 바로 젓국 갈비다. 강화도에서 키운 돼지를 잡아 푸성귀와 인삼을 넣고 새우젓으로 간을 하여 푹 끓여낸 젓국갈비는 ‘임금의 보양식’이라는 별명을 붙이기에도 손색이 없을 정도의 영양식이었다.
젓국갈비 한 그릇이면 강화의 특산물을 모두 맛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국물을 내는 새우젓은 젓국갈비의 가장 중요한 재료. 강화의 새우젓은 껍질이 얇고 영양이 풍부해 더욱 깊은 맛을 낸다. 여기에 기름기를 뺀 돼지갈비로 육수 의 맛을 더하고 두부, 버섯, 배추 등 강화에 서 재배된 각종 채소를 듬뿍 넣으면 맑고 개운한 국물이 우러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