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숨 쉬는 신라 천 년의 숨결, 경주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존재했지만 만나볼 수 없었던 신라의 고귀한 역사가 디지털로 재현된다. 우직하게 자리를 지키고 선 유산들과 첨단 기술로 구현된 1000년의 시간. 옛것과 새것 사이, 올드 앤 뉴(Old & New)의 교차점에서 경주를 만났다.봉긋한 황금빛 고분은 경주의 상징이다. 도심을 거닐며 마주하는 능의 자태는 익숙하지만, 그 속을 들여다본 이는 많지 않다. 신라시대 무덤이 품은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엿듣기 위해 경주 대릉원 일원, 그중 노서동으로 향했다. 연면적 576㎡(174평)의 1층 건물 하나가 크고 작은 고분 사이로 균형을 맞추듯 들어서 있다.
일렬로 늘어선 푸릇한 오죽을 따라 걷다 보면 신라고분정보센터가 모습을 드러낸다. 신라왕경 핵심유적 복원·정비 사업의 일부로 2020년 12월 착공해 2023년 6월 30일 개관했다.
센터의 자랑은 ‘실감 영상’으로 불리는 디지털 영상 콘텐츠. ‘아르떼뮤지엄’을 연상케 하는 증강현실(AR) 전시가 신라 고분 콘텐츠와 만나 화려한 볼거리를 선사한다. 35m의 미디어월을 갖춘 디지털 실감 영상실에서 신라 고분 1000년, 신라인의 삶과 죽음, 천마총 발굴 50주년, 하늘에서 본 고분 등 신라 고분의 역사와 풍경을 담은 디지털 영상이 시간별로 상영된다. 올해 50주년을 맞은 천마총 발굴 이야기가 흥미롭다. 1973년부터 이어진 발굴 현장과 관련한 에피소드를 고고학자 6명의 입을 통해 실감 나게 들을 수 있다.
경북 감포 문무왕릉 인근 동해 바다가 미디어월을 넘어 바닥까지 밀려오자 관람객 입에서 탄성이 터져나온다. 발밑으로 부서지는 푸른 파도가 실제 바다에 와 있는 듯한 착각을 선사한다. ‘고분의 도시’ 경주를 하늘에서 바라본 드론 실감 영상까지 감상하고 나니 신라 1000년의 시간이 성큼 와 닿는다.
관람객을 위한 세심한 설계와 숨은 이야기도 눈에 띈다. 대릉원으로 향하는 벽 한 면을 창문으로 설계해 노서동 고분군 뷰를 조망할 수 있다. 오직 경주에서만 펼쳐지는 특별한 전망에 외국인 관광객이 일제히 모여 스마트폰과 카메라를 꺼내 든다. 입구의 천장은 돌무지덧널무덤의 주곽·목곽 구조를 차용해 실제 크기로 디자인했다. 모르고 봐도 흥미롭지만 알고 보면 더 재밌는 공간이다.
가장 역사적이고 가장 현대적인
노서동 고분군에는 또 하나의 건축물이 웅크리고 있다. 달팽이를 닮은 나선형 돔구조물의 정체는 신라 돌무지덧널무덤의 모양새를 본떠 만든 금관총 보존전시관이다.금관총은 최초로 신라 금관이 발견된 터다. 보통 왕과 왕비의 무덤을 ‘능’이라 하고, 왕족·귀족의 묘인 것은 확실하지만 주인을 알 수 없는 능은 ‘총’이라 한다.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 금관총 역시 주인을 알 수 없는 무덤이었다. 그런데 2013년 놀라운 사실이 공개됐다. 금관총에서 출토된 칼에서 ‘이사지왕(尒斯智王)’이라는 글자가 발견된 것이다. 이어 2015년 금관총을 재발굴하는 과정에서 ‘이사지왕도(尒斯智王刀)’라는 글자가 새겨진 칼집 조각이 추가로 발굴되며, 금관총은 경주 지역의 신라 돌무지덧널무덤 중 유일하게 무덤 주인공을 알 수 있는 고분이 됐다.
금관총 전시관은 길이 48m, 높이 12m의 규모를 자랑한다. 봉분을 최대한 훼손하지 않으면서 내부는 돌무지덧널무덤의 원형을 구현해 과거 웅장함을 자랑했을 고분의 실제 크기를 짐작해볼 수 있다. 당시 흙과 돌을 그대로 사용했고 목조 구조를 1 대 1로 재현했다. 고분 축조 과정을 보여주는 체험시설을 통해 43인치 증강현실(AR) 모니터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무덤 곳곳을 비추면 축조 과정을 디지털 영상으로 감상할 수 있다. 신라고분정보센터, 노서동 고분군, 황리단길이 지척이라 함께 둘러보기 좋다. 금관총 정문으로 나가면 배우 이나영 주연의 웹드라마 <박하경 여행기> 포스터 속 배경이 된 장소도 만날 수 있다.
서라벌의 랜드마크를 찾아
경주는 지붕 없는 박물관이다. 신라시대의 수많은 황금 유산이 산재해 도시 전체가 문화유산이다. 그 가치를 인정받아 2000년에는 ‘경주역사유적지구(남산·월성·대릉원·황룡사·산성 지구)’ 5곳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됐다. 그중 황룡사 터와 분황사 터를 간직한 황룡사 지구로 발걸음을 옮겼다. 신라 사직의 상징인 황룡사는 서라벌의 상징이었다. 탑이 세워지기 이전의 신라는 끊임없는 위기에 시달렸고 민심은 뒤숭숭했다. 불심이 남달랐던 선덕여왕은 백성의 평안과 나라의 안정을 기원하며 세상에 없던 규모의 목탑을 세웠다. 신라는 황룡사 9층 목탑을 완성한 지 23년 만에 기적처럼 삼국통일을 이룬다.안타깝게도 고려 말 몽골군의 침입으로 목탑은 물론 장륙존상 전각 등 황룡사 전체가 불에 타 소실됐다. 터만 남은 신라 최고의 사찰, 경주 황룡사의 못다 전한 이야기는 바로 옆에 위치한 황룡사지 황룡사역사문화관에서 엿들을 수 있다. 황룡사 건립 과정을 담은 3D 영상 시청각실, 황룡사 발굴조사 터가 한눈에 들어오는 2층 전망대 등을 갖췄다. 높이 약 80m에 달하는 황룡사 9층 목탑을 10분의 1 크기로 재현한 모형을 눈에 담아본다. 모형만으로도 위압감이 느껴지는 목탑의 원래 높이는 지금의 27층 건물 높이에 해당한다. 현대 건축기술로도 흉내 내기 어려울 정도의 과학이 이 건물에 깃들어 있다고 하니, 당시 황룡사가 지녔을 위엄을 감히 짐작만 해볼 뿐이다.
경주시와 문화재청은 2025년까지 ‘신라왕경 디지털 복원’을 추진한다. 실물 복원이 어려운 황룡사 9층 목탑과 중금당을 포함한 주요 건축물이 3D 디지털 콘텐츠로 복원된다. 천년 신라왕경의 대표 유적을 메타버스 공간에서 만날 날이 멀지 않았다.
월성의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
신라시대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조성된 월성 해자. 1500년 전엔 어떤 모습이었을까. 과거 월성 해자와 그 주변의 옛 환경을 생생한 영상으로 감상할 수 있는 특별기획전시 ‘실감: 월성 해자’와 함께 시간 여행을 떠나보자.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지난 1984년부터 월성 해자 발굴 조사를, 2017년부터는 월성 해자 주변의 고환경 조사·연구를 진행해왔다. 신라월성연구센터(숭문대) 전시동에서 열리는 이번 전시에서는 신라시대 월성 해자의 모습을 실감 영상으로 재현해 최초 공개했다.공간은 2개의 전시관과 통로로 구성됐다. 1전시실에서는 월성 해자의 축조 과정과 함께 출토된 동·식물 자료를 바탕으로 복원된 주변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벚꽃이 흐드러진 봄부터 푸른 수생식물이 꽃을 피우는 여름, 붉은빛으로 물든 가을, 눈 덮인 사철나무에 눈이 시린 겨울까지. 약간의 상상력을 더한 월성 주변의 사계절이 펼쳐진다. 과거의 월성 해자를 감상했으니 현대의 해자를 눈에 담을 차례. 숭문대에서 도보로 10분이면 경주역사유적지구 월성지구에 닿는다. 무려 830여 년간 왕궁으로 존재하며 같은 자리를 지킨 월성과 이를 둘러싼 해자의 모습이 사뭇 신비롭다.
주경도 아름답지만, 어둠이 내린 해자는 그 아름다움이 배가되니 야경도 놓치지 말 것. 경주 월성으로 가는 길에 있는 한옥마을 교촌마을과 원효대사의 사랑 이야기가 깃든 월정교도 함께 둘러볼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