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이 눈부셨다. 구석구석 눈길이 닿지 않은 곳까지 비추어 세상에 보이리. 저 낮은 곳에 있는 작고 여린 것들, 세상에 드러내어 제 쓸모를 다하게 하리. 태양의 혼잣말을 들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사제,
김대건 신부가 태어난 당진에 버그내 순례길

충남 당진 신리성지
충남 당진 신리성지
충남 당진, 솔뫼성지에서 시작해 신리성지로 이어지는 버그내 순례길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천주교 성지 중 하나다. 특히 솔뫼성지는 우리나라 최초의 사제인 김대건 신부가 태어난 곳으로 당진은 천주교 신앙의 못자리로서 그 의미가 깊다.

순례길 앞의 ‘버그내’는 이곳 순례길 일대를 한데 어우르는 지명이자, 조선시대에 삽교천을 ‘범근내’로 부른 데서 비롯된다. 충남에서 두 번째로 큰 국가하천인 삽교천이 첫 번째로 큰 안성천에 ‘버금간다’는 뜻에서 ‘버근내’가 되었다가 동음 음운 탈락 현상으로 ‘버그내’로 정착한 것이다. 한자어로 시작해 세상 어디에도 없는 우리말이 된 ‘버그내’. 이 글자가 한없이 낯설면서도 왜인지 따뜻해 잊히지 않았다.
충남 당진 솔뫼성지
충남 당진 솔뫼성지
김대건 신부가 걸어온 길도 그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때 사람들은 모두가 숨죽이며 세상에 처음 듣는 낯선 말을 귀에 듣고 가슴에 새겼다. “사람은 모두가 평등하다”라는 그 진리를 품에 안은 가엾은 이들이 집에 돌아와 사랑하는 이들에게 말했다.

“우리는 양반과 다름없이 평등한 존재란다. 태어나 죽을 때까지 가난하고 천대받으며 살지 않아도 되는 귀한 자들이라고 하는구나.”

김대건 신부의 집안은 우리나라 천주교 역사와 맥을 같이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버지에서 증조부까지 4대에 걸쳐 세례를 받은 천주교인이었던 것이다. 1784년 한국천주교회가 창설되고 그의 증조할아버지 김진후는 1814년 해미(충남 서산 ‘해미순교성지’)에서 순교한다. 이후 작은할아버지 김종한, 아버지 김제준까지 차례로 순교한다.
충남 당진 솔뫼성지
충남 당진 솔뫼성지
조선 후기, 나라에서는 집요하게 천주교인을 찾아내 끔찍한 고통을 가했고, 김대건 일가는 더 이상 정든 마을에서 살기 어려운 처지에 놓였다. 7세의 김대건은 4대째 살던 솔뫼를 떠나 서울로 피신하고, 1836년 15세의 나이에 마카오로 사제가 되기 위한 험난한 여정을 떠난다. 살을 에는 듯한 추위에 깊이를 알 수 없는 압록강이 얼기를 기다려야 했던 시간들, 소년은 해가 바뀌고서야 마카오에 도착할 수 있었다.
충남 당진 합덕성당
충남 당진 합덕성당
6년 동안 신학교육을 받은 김대건은 이후 신부로서도 큰 역할을 했지만, 양학을 배운 사람으로서 조선이라는 나라를 외국에 알리는 데도 큰 기여를 했다. 그가 서울에 머물며 제작한 조선전도는 독도까지 포함되어 있으며 모든 지명이 한국식 발음의 라틴어로 표기되었다.

서구사회에 우리나라 지명을 소개한 첫 지도, 김대건의 조선전도는 대동여지도보다 16년 앞선 것으로 오늘날에는 독도가 우리 땅이라는 명확한 증거로도 작용한다.

김대건 신부의 하루는 마치 일 년처럼

김대건이 다시 고국에 돌아간다고 했을 때 주변의 많은 사람이 반대했다. 당장 내일의 목숨을 담보할 수 없는 조선 땅 아닌가. 그러나 김대건은 뜻을 굽히지 않고 1845년 1월, 고국에 돌아왔다. 그러나 고국은 그를 환영하지 않았다. 김대건은 그도 모르는 사이 수배자가 되어 있었다. 위태로운 매순간, 그의 하루는 마치 일 년 같지 않았을까?
충남 당진 세거리공소
충남 당진 세거리공소
우리나라 최초의 양학 유학자로 라틴어, 프랑스어, 중국어, 영어, 조선어 등 5개 국어에 능통했던 그는 동아시아 근현대사의 획을 긋는 인물이다. 1842년 난징조약(제2차 아편전쟁) 통역관으로도 참석했으며, 외국인 선교사의 조선 입국로를 개척하는 데 부단한 노력을 다했다.

이 땅에 존재하지 않았던 천주교의 교리가 전파되는 데 외국인 선교사들의 역할을 어찌 빼놓을 수 있을까. 덕분에 김대건은 조선에서는 제일 첫 번째 위험인물 중 하나이기도 했을 것이다.
충남 당진 하흑공소
충남 당진 하흑공소
고국에 돌아온 그해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를 모시러 다시금 먼 길을 떠난 김대건은 8월 17일 중국 상하이 김가항성당에서 제3대 조선대목구장 페레올 주교로부터 사제 서품을 받는다.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가 탄생한 날이다.

상하이를 떠난 라파엘호는 두 달이 넘어 강경포구에 도착했다. 25세의 김대건 신부와 페레올 주교, 다블뤼 신부는 조선의 교우들을 만나 복음을 전파했다. 김대건 신부는 다시금 선교사 입국로를 개척하기 위해 황해도로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관헌에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는다.

당시 조정은 김대건 신부의 능력을 높이 사 모진 고문과 함께 회유했으나 그의 뜻을 굽힐 수는 없었다. 그는 조정의 요청으로 옥중에서 세계 지리 편람을 전술하고 영국제 세계지도를 번역하기도 했다. 사제 서품을 받은 지 일 년이 막 지나던 때, 1846년 9월 김대건 신부는 새남터에서 순교한다. 그의 나이 26세였다.

푸른 하늘 아래, 산과 들, 오솔길을 따라 순례길을 걷는 사람들은 ‘우리가 기억하고 있다’고 온몸으로 말하는 것 같았다. 솔뫼성지에서 신리성지로 이어지는 13.3km 구간, 그중 솔뫼성지는 김대건 신부가 태어난 곳, 신리성지는 그와 함께 입국한 다블뤼 주교가 죽을 때까지 머물며 신앙을 전파한 곳이자 내포 교회의 초기 공소가 있던 곳이다.